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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Aug 29. 2019

휴식 사용 설명서

우리 '쉼'에 대해 배워볼까요

사소한 일에도 아주 쉽게 욱하고, 모든 일이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지치고 그냥 혼자만의 시간이 그리웠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휴식을 취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퇴근을 하고 나서 미뤄둔 지인과의 약속을 나가야 했다. 그게 아닌 날에는 퇴근하고 와서도 풀썩 침대에 누울 수 조차 없었다. 끊임없는 폭언이 메신저를 통해 비수가 되어 날아왔기 때문이다.


학교에선 도대체 뭘 배웠을까? 공부하는 방법과 열심히 하는 방법 정도 배웠으려나. 선생님들은 매일 엎드려 있는 친구들에게 분필을 던지며 말씀하셨다. '너 그렇게 수업 시간에 자면 어른돼서 뭐 될라 그러냐?' 선생님이 하시던 걱정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매일 엎드려 자던 몽상가 친구는 래퍼가 되어 티비에 출연해 '떼돈' 벌고 있으니까.


아니,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건 배웠는데 어떻게 쉬는지 배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최근 회사를 나온 친구와 대화하다 알게 됐다. 우리는 왜 이렇게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인지.


제대로 쉬고 싶지 않냐?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참아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부터 얼굴 전체가 빨갛게 달아오른다. 몇 초 동안 참을 수 있었을까? 고작 30초도 지나지 않아 참아온 숨을 내뱉는다. 그제야 왜 그렇게 일하는 게 힘들었는지 알게 된다. 힘이 든 상황이 됐을 때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참아버린 우리는 정작 어떻게 뱉어내야 하는지 몰랐다.


우리의 인생은 너무 짧다. 매일이 쉴 틈 없이 바쁘기 때문이다. 바쁘다는 건, 밭다와 브가 합쳐진 말로 잦다 혹은 짧다는 의미의 단어다. 기침을 밭게 하는 건 자주 한다는 의미다. 어떤 일을 계속 잦게 해야 한다는 건 바쁘다는 의미다. 이렇게 우리는 자발적으로 시간을 짧고 또 짧게 만든다.


잠깐이라도 쉬었다 가면 안될까요?

학교 대표로 육상부 선수를 하던 어느 날, 연습이 끝나고 급하게 학교 교실로 뛰어 올라가던 중에 친구를 만났다. 등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한 계단씩 밟고 가는 친구의 손을 다급하게 잡아당겼다. 


"이렇게 느리게 걷다간 늦어. 선생님한테 혼나겠다.  빨리 가자!"

"너 숨 차, 그냥 천천히 가자."


'휴식(休息)' 쉴 휴(따뜻하게 할 휴), 쉴 식. 휴에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쉰다는 의미와 식에는 숨을 쉬는 의미가 있다. 곧, 몸과 마음이 함께 쉬는 것이 진정한 휴식이라는 것이다. 그저 지금껏 침대에 몸만 뉘어왔던 휴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숨을 잘 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멈춰보는 것. 그게 바로 휴식이라는 거다.


요가를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도 '바투 쉬던 숨을 한숨 돌리기 위한' 나의 의도적인 행위였다. 요가 매트 안의 세계에서는 숨을 참고 내 감정을 표출하지 않을 필요가 없었다. 들숨 날숨 내 쉬면서 내 몸의 작용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던 내가 요가 자격증을 취득하며 일로 요가를 배우기 시작하자 버릇처럼 숨을 참고 있다. 무조건 버텨내야 한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머릿속에서 피어난다. 


제자리로 돌아올 때가 되었습니다


열두 살 어린아이가 뭘 안다고 그렇게 말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친구 말 듣을걸 후회된다. 숨조차 쉬지 않고 달려온 난 바쁜 게 미덕이라 생각했다. 아니 여전히 그런지도 모르겠다. 휴식에 대해 쓰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도 지난주에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쉰 시간이 없다.


노년이 되어야 완전히 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예전에 난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옛 어른의 말과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정서적 쉼을 무시하는 언어폭력이 난무하던 문장을 수긍했다. 더 아름다운 노년이 되기 위해 해야만 하는 당위적인 선택이라 생각했다.


이젠 쉬어야만 나를 온전히 지킬 수 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1934 세대는 '쉼'의 가치를 깨달았다. 우리 세대는 돈을 덜 벌더라도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삶인 워라밸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무민 세대'로 불리는데 무의미한 것에서도 스스로의 의미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보면 휴식을 잘 한 사람이 더 롱런할 수 있었다. 휴식하지 않으면 정신력이 고갈된다. 그로 인해 의미 있는 진척을 만들어 내기 쉽지 않다. 오래 일하고 싶은 만큼 휴식도 계획해서 시간을 써야 하는 것이었다. 쉰다면서 자꾸 머릿속에 해야 할 일이 둥둥 떠다니면 이내 누워있다가 침대에서 스프링처럼 일어나는 것을 멈춰야 했다.


계속 생각한다고 해서 좋은 글이 나오는 게 아니다. 키보드 위에 손을 두고 깜빡이는 커서를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이게 무슨 짓인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결국 견뎌야 또 좋은 단어가 나오고 상상해야 또 다른 실타래가 풀리기 마련이지만, 지루한 이 시간들이 버거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냥 땀을 빼면서 운동하고 또 읽을거리를 읽으면서 나를 위한 시간을 쓰는 게 오히려 '의미 있는 휴식'의 한 페이지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우리는 쉼에 대해 배울 때가 아닌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에야 휴식을 했다고 생각한다. 주말이 되면 밀린 잠을 잔다거나 퇴근 후 맥주를 가지고 소파에 앉아 영화를 켠다. 나의 성향 때문인지, 영화를 보고 나서도 쉬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사회 이슈가 담기거나 감동이 없는 영화를 보는 건 무의미하기 때문에 영화를 본 후엔 피로도가 배가 된다. 


울리히 슈나벨은 <휴식>을 이렇게 정의했다. '중요한 것은 하루의 리듬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느낌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휴식이란 그저 텅 비어있는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자발적인 선택을 통해 하루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느낌을 가질 때, 진정한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모래가 떨어질 때마다 불안해 더 급해지던 나, 여전하다.


노동은 가치 있는 것이며 휴식은 보잘것없는 것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시대 때부터다.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일하다 죽는 사람은 없지만, 놀기를 좋아하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몸과 인생을 모두 망친다'는 말로 한가함은 우리 삶의 가치와 동떨어진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우리 자체는 일이 아니다. 진정한 나를 알아야 나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쉼과 더 나아가 정서적인 쉼을 함께 누리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짧지만 질 높은 힐링을 추구하는 사람이 늘어나 '패스트 힐링'이 금년도 한국인이 열광할 트렌드라 한다. 패스트 힐링의 방법은 해먹, 침대 등에서 짧은 시간 질 높은 숙면을 취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서적 쉼을 통해 나를 위한 시간을 찾는 쉬운 방법은 있을까? 많은 비용과 시간을 지불하면 자아를 탐색할 수 있는 공간은 꽤 많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꼭 그렇게 비용까지 지불해야 할까. 작은 비용과 짧은 시간으로도 가치 있는 '휴식'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난 '휴식의 문'을 열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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