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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Oct 03. 2019

누구에게나 꼭 있는 나만의 기후

감정 덩어리가 모여 나의 기후를 이룹니다

'안녕하세요' 출근과 동시에 목청껏 인사를 해 옆 파티션까지 두더지가 된 것 마냥 목을 빼꼼 내밀고 나를 쳐다보던 그 시절. 인사 덕분에 칭찬받고 인사 잘해서 평생 먹고 살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그 시절. 누구에게나 밝고 명량한 기운을 주는 이십 대 청년이라 불리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나는 밝으면서도 둔감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미안하다, 고맙다와 같은 감정을 쉽게 잘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솔직하면서도 활기차다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쉽게 어울릴 수 있는 둥글둥글함이 있었고, 관심과 애정이 익숙한 타입이었다. 만약 내게 관심이 쏠리지 않으면 불안했고, 쉬이 타인의 눈치를 보고 분위기가 살벌하다면 온 몸의 촉수를 세워 공간 안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 최선을 다했다.


당신의 기후는 어떻습니까?


장대비가 억수로 내리다 비가 그치고 햇살이 방으로 스며든다. 갑작스러운 비 소식에 익숙지 않은 나와 남편은 집 밖으로 나설 채비를 하고, 걱정을 한 아름 안고 서 있었다. 이번 여름 역시 스쳐 지나가는 잠깐의 장마와 푹푹 찌는 듯한 더위로 밤에 잘 때도 에어컨이 쉴 새 없이 돌아갔다.


날씨가 반복되면 그 나라의 기후를 만든다. 기후란 30년 이상의 기간 동안 평균적인 날씨를 뜻한다. 아주 멀리서 나를 바라보며 일기를 쓰다가 느꼈다. 나에게도 날씨가 있다는 걸. 매일 나의 감정은 변화했다. 누군가로 인한 먹구름이 밀려올 때도 있었고, 기분 좋은 일로 인해 따스한 햇살이 감싸줄 때도 있다는 걸. 그렇게 감정은 날씨라는 걸 깨달았다.


원래 나는 따뜻한 아열대성 기후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어느 누구든 진정한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이다 보니, 타인을 수용하려고 노력해왔다. 어떤 상황이더라도 긍정적으로 사고하려 노력했고, 그게 정답이라고 지금껏 알고 있었다. 성장하면서 부모님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왔고, 무수히 많은 어른들의 칭찬으로 따스한 햇살 안에 몸을 뉘어있었던 나는 에너지도 높고, 기분도 높은 편인 따스한 기후를 가진 사람이었다. 날씨가 감정이라면 기후는 정서 곧, 나의 지속적인 분위기를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만큼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기상청은 사람들이 변화한 날씨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루 전날 기상캐스터의 입을 빌려 날씨를 예측해준다. 물론 다 맞지는 않지만 우산을 챙겨가는 정도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람과의 관계에도 기상캐스터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예측할 수 없는 그들의 폭언 장대비와 아무런 생각 없이 뱉어대는 관습들로 인해 온 몸이 젖어버려 최악의 몰골로 집에 갔던 적이 많았다.


돌연 나의 기후가 바뀌기 시작했다


20대 중반에야 제대로 된 밥벌이를 시작했다. 밥벌이를 지속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만 앞서 허둥댄다. 미안하다는 말에 이어 죄송하다는 말도 입에 달고 살았다. 잘못이 아닌 것도 잘못으로 쉽게 인정하는 탓이었을까. 경력이 나와 십 년이나 차이나는 선배는 나를 눈앳가시로 생각하며 하루에 한 번씩 내 마음에 장대비를 내려주었다.


평온하고 눈부시던 나의 기후는 점점 어두워지고 차가워졌다. 매일 장대비가 내리는 탓에 마음 안에서 자라고 있던 식물의 잔가지가 꺾였고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나의 감정 하나조차 내가 컨트롤할 수 없음에 불안한 하루하루가 지속됐다. 그렇게 돌연 나의 기후가 바뀌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됐다.


반복되던 날씨 끝에 결국 기후가 바뀌었다. 따뜻한 온도 안에서 장대비가 내리다가 점점 날씨도 차가워졌다. 그렇게 눈이 쌓이고 입김을 불 정도로 온도가 내려간 내 마음. 변한 이 공간을 어찌할지 모르다가 감정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새로운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감정을 쓰고 그 옆에다가 왜 그 감정이 일어났는지 그 원인을 써 내려갔다. 하루를 일분일초로 해체해보는 것이다.


감정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었다. 한 상황에 포착하다 보니 나의 감정이 그리 중요하지 않든 것이었다. 행복 강박증에 쌓여 항상 행복해야 한다는 명분 하에 변한 기후가 무서웠는데 그리 무서운 게 아니었다. 긍정과 부정은 없고, 모든 건 다 나의 것이다.


갑작스러운 비는 어쩔 수 없이 맞아야하잖아.


첫 데이트 날에는 화창하면 좋겠지만, 우리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만큼 날씨를 어찌할 수 없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인간인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게 바로 감정이다. 누군가로 인해 충격적인 감정을 마주했더라도 우리는 그저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생각의 좌표>의 홍세화 작가 역시, '정서가 의식과 같이 움직이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라고 말한다.


한 가지는 알겠다. 정서는 인간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를 보존하려는 욕구를 가진 우리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밝고 명랑한 나도 그냥 나이고, 우울하고 힘든 나도 그저 나였다. 좋고 나쁨은 없었다. 다만 내가 그걸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대처를 했느냐에 따라 나의 존재가 달려있던 것이다.


예민해도 괜찮다. 예민할수록 나를 더욱 표현할 수 있고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는 행복 강박증에서 벗어나, 나의 날씨를 온전히 바라보는 연습을, 감정일기를 우리 함께 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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