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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Oct 15. 2019

누군가에게 칼날이 된 우아한 거짓말, 악플

<우아한 거짓말>을 습관처럼 해온 당신

경력 같은 신입이 되기 위해 인턴만 세 번 해낸 무식한 인간이 여기 있다. 그 고지를 오를 때까지 수 백개의 자기소개서를 쓰고 수 십 번의 면접을 보면서 힘들단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냥 눈 앞에 목표를 향해 나아갔을 뿐. 도전의 여정을 아는 최측근들은 나의 끈기를 추켜세운다. 경력 같은 신입이라는 말은 당시 내게 큰 힘을 줬다.


신입이라는 말은 왜 허용되지 않을까? 때에 따라 변화하는 그들의 문장은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었다. 신입 사원답게 인사성이 발라야지. 신입도 신입 나름이지. 이 정도 일을 못하면 안 되잖아. 경력 같은 신입이 되고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신입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말


당신 역시 들었을 수 있을 ‘점잖다’는 단어. 단 한 번도 이상하단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점잖다는 뜻을 보고 화들짝 놀라 내가 했던 말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혹시 나도 다른 사람에게 점잖다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 온건 아닐지, 그들은 어떤 감정이었을지 상상해본다.


점잖다는 말은 젊지 않다는 말이다. 어린아이에게 ‘넌 참 점잖구나.’라는 칭찬으로 어린아이답지 않음이 옳다고 말하는 어른이 바로 내가 아니었을지. 초등학생들에게 착하다는 말이 어쩌면 폭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네다섯 살 어린아이 때부터 우리는 누군가의 기대에 맞춰 살고 있었다.


이제 당신의 그 말을 멈추세요.


당연하게 해왔던 말들이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은 수평적인 관계가 될 수 없다. 나이 때문에 혹은 예전부터 그와 맺어왔던 관계로 인해 약간은 경사가 진 채로 누군가를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는 게 당연해졌다. 평범한 소시민이라면 누군가의 단어로 인해 욱하는 순간이 와도 내가 예민한 거라며 억누르는 게 습관이 됐을 것이다. 다 자란 어른이 되고, 내가 바라는 것을 찾기 시작할 때쯤 돼서야 우리는 욱하게 된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맞서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우아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는 우아한 거짓말을 해 왔을지 모르겠다. 경력 같은 신입이라는 말을 들어보면 참 어패가 있지 않은가. 결국 그들이 원하는 사람들은 진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신입으로 들어온다면 완전히 막내로 그들에게 굴복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했고, 경력 같은 신입이라는 말은 적어도 1년 이상의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언어는 은밀한 따돌림을 종용한다. 사회의 관점이 다채로워지고 있다지만 우리가 쓰는 언어는 참으로 한정돼 있다. 언어 학자인 사피어는 "인간은 객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매개로 한 세계에 살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 정도로 우리가 행동하는 양식, 바라보는 이 모든 세계는 정의할 수 있는 도구인 언어를 통해 인식된다는 것이다.


칼보다 더 무서운 우리의 단어들.


선입견을 만드는 언어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칼이 된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악의적으로 조장한 선입견이라면 더욱 그렇다.


정려령의 책 <우아한 거짓말>의 첫 시작은 한 가정집의 둘째 딸의 자살로 내용을 시작한다. 엄마에게 최신형 MP3를 사달라고 했다면 그래도 원하는 게 있던 거고, 삶의 의지가 있다는 건데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건지 처음엔 감이 잡히질 않았다. 가족들에게 도통 자신의 감정 상태를 드러내지 않던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가족들은 더 큰 고통에 휩싸인다.


동생의 죽음을 하나씩 파헤치던 만지는 무던하게 넘어갔던 단어를 곱씹어 보며 후회한다. 그리고 동생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화연에게 만지의 모습을 물어본다.


천지의 제일 친한 친구 화연은 친한 친구라는 명목하게 아주 교묘하고 우아하게 그녀를 괴롭힌다. 겉으로 보기에는 둘도 없는 단짝이지만 그 이면을 파헤쳐보면 주변 친구들에게 나쁜 선입견을 심어놓고 있었다. ‘멍청할 정도로 착해’라는 말의 주제는 결국 멍청이라는 말이듯이. 칭찬을 가장해 친구들 앞에서 몇 년 동안 화연이 휘두른 칼에 상처 입은 천지는 입을 꾹 다물고 실뜨기를 이어갔다.


마지막 그녀들의 투항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죽기 며칠 전, 수행평가에서 천지는 “선입견”의 정의와 그 사례에 대해 발표를 한다. 보란듯 화연을 향한 화살을 보냈지만 화연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대단하다’며 무시할 뿐. 자신의 아픔을 알아달라 주변 인에게 온 힘을 다해 말했음에도 그 누구도, 그리고 아픔을 준 피의자는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실에 삶의 의지는 화르륵 사라진다.


이 글을 올리기로 한 오늘, 한 유명 여자 연예인인 설리가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소신껏 그리고 누구보다 솔직하게 자기 표현을 하던 그녀는 사람들의 표적이 됐다. 온라인 상에서 그녀를 향해 날아들던 악플의 수준은 도가 지나쳤고, 그렇지만 그녀는 그 악플들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악플을 읽는 프로그램에 나갔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프로그램에 나온 그녀는 괜찮아보였다. 표면적으로는. 내면에서 어떤 동요가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던 난 정말 다행이려니 생각했다. 아마 천지처럼 자신에 대한 지독한 선입견을 깨려는 일종의 투항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더 아프다. 어쩌면 우리에게 남기려고 했던 마지막 말도, 천지가 실타래 안에 남긴 “용서한다.” 는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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