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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Jun 06. 2019

낮에만 보이는 무엇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하루쯤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회사를 그만두자 시간은 3배 정도 빨리 흐른다. 아침을 먹고 나면 오후 시간은 그냥 증발해버린다. 점심시간에 광합성하는 걸 좋아했던 나는 집에서 나갈 일이 없더라도 무조건 밖으로 나간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걸 보거나 공원을 산책하며 '나는 살아있다'는 걸 느끼는 시간이 필요하다.


선명한 대낮의 간판은 동네의 변천사와 서사를 읽을 수 있었다


유독 낮이 긴 여름이 반갑다.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선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버스에 올라탄다. 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오후, 버스를 타면 익숙지 않은 풍경들이 나를 자극한다. 낯선 동네에서는 내가 맡아보지 못했던 냄새가 난다. 어둠 속에선 그저 촉수를 세워 목적지에 도달해야 했다. 대낮엔 풍경을 읽어내려갈 여유가 생긴다. 간판을 따라가면 그 동네의 변천사를 느낄 수 있고, 한 편의 서사를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그리고 느끼지 못했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공원을 걸으며 무의식 중에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아카시아 향 너무 좋다.' 남편은 내게 말했다. '회사 다니고 있으면 지쳐서 향기를 느낄 새도 없이 빠르게 걸어갔을 거야. 우리가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좋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같이 서서 향기를 맡으며 또 행복했다.


퇴근 시간이면 나와 똑같이 피곤에 찌든 직장인을 볼 수 있다. 유독 상사에게 깨진 사람들은 핸드폰을 들고 친구에게 전화해 상사 욕을 시작한다. 일이 너무 고단했던 사람들은 지하철 손잡이에 기대어 서서 자다가 앉아있는 앞사람의 무릎을 계속 치다가 결국 죄송하다는 말을 한다. 오늘 나에겐 어떤 고단함이 있었는지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반대로 낮 시간엔 극명하게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찌들어버린 그들 대신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와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들이 보인다. 그리고 장바구니를 들고 있는 아주머니, 더러 책가방을 맨 젊은 사람들도 눈에 띈다.


버스를 기다리는 데 맞은편 교복을 풀어헤친 고등학생이 다가온다. 왼손에 무언 갈 들고 있다. 입 쪽으로 가져가는 게 보인다. 그가 지나치던 순간 내 코로 훅 하고 기분 나쁜 냄새가 들어온다.



나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들을 이해하고 싶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너무 많았다. 왜 어른들은 그렇게나 많이 한숨을 쉬는 건지, 한숨 끝에 담배를 무는 이유는 무엇인지. 학교라는 보호받는 울타리를 지나 나만의 울타리를 만들어가는 시간이 지나오며 조금씩 어른의 무게라는 게 느껴진다.


그렇게 빨리 어른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무서운 일이었다. 어른의 무게만 충분히 느끼고 있을 뿐, 그저 이뤄놓은 게 없는 20대가 지나가고 있기에 더 무섭다. 돈 많이 주고 복지가 좋은 대기업에 다니면 행복할 것 같았던 그 시간들은 지나고 자유를 고민하는 30대를 목전에 두고 있다.


버스에서 지하철로 갈아탔다. 지하 깊숙한 곳으로 내려왔다. 앉을 생각은 하지 않고 기댈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지하철이 멈추자 몸이 옆으로 확 밀렸다. 지팡이를 짚고 계시던 할머니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내 몸으로 쏠리셨다. 의도하지 않으셨다는 듯, 더 버티지 못한 자신의 팔과 다리를 탓하며 말씀하셨다. "아이고, 내가 다리에 힘이 없어서..."



그 순간 그녀의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내가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지팡이를 짚고 계시던 할머니를 보시고 노약자석에 있었던 다른 할머니가 앉으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예의 바르게 거절하시며 힘을 길러야 한다고 서 계시던 할머니는 당황스러움에 뒤를 돌아 손이 하얘질 때까지 지팡이와 기둥을 붙잡으셨다.


낮엔 깜깜할 어둠을 느낄 수 없듯이 젊을 땐 나이 든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영국 작가 버나드 쇼의 말이 마음에 와 닿기 시작하면 나이 든 거라던 한 책의 말이 기억난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


우리에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많은 시간이 존재한다. 일상에 찌들고 익숙해지다 보면 뜻밖의 행복을 찾기란 정말 어렵다. 지금, 낮에만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느끼고 그냥 지나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기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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