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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Sep 24. 2019

인생은 그렇게 지나가리라

당신의 이야기, 하나

사진 한 장 속에서 나의 경험을 발견하는 사람들. 아니면 상상력을 가미한 이야기들. 당신이라면 이 사진을 보고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우리의 뜨거웠던 여름밤은 그렇게 지나갔지만, 각자의 서사는 가을, 겨울을 넘어 한 해를 지나가리라. 시시때때로 우는 내 마음의 소리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우리가 되길 바라며.


무제 _ 민영


빌딩숲학교 사진 수강생분의 사진을 제공받았습니다.


파란 바다를 바람이 치고 지나가며 하얀 파도가 방울방울 튀었다. 까만 바위를 두들기는 물방울들은 제각기 최선을 다해 바위를 부술 것처럼 온몸을 부딪혀 본다. 그렇게 한 방울, 두 방울이 힘을 보태면 언젠가는 바위도 부서질 것이다. 굳건한 바위 같은 어둠을 깨트리는 것은 결국 티끌만큼 작은 최선들이다.


오르막길_한나


유럽에서 보낸 교환학생 학기가 끝이 났다. 아쉬움도 잠시, 나는 또 다른 꿈을 꿨다.


본교로 돌아가면 꼼짝없이 공부를 해야 했지만, 첫 자취생활에 마냥 설렜다. 엄마가 방을 얻어놓았다는 서울역으로 향하며 집채만 한 이민가방이 무거운 줄도 몰랐다.


서울역에서 숙대 사이에 있는 그 동네에는 생뚱맞은 위치에 암벽등반을 할 수 있는 구조물이 있었다. 동네를 둘러보다 줄 하나만 잡고 절벽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게 됐다. 무섭지도 않나? 떨어지면 죽을까 봐 못 오를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그들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그 시절 내가 등반한 곳은 집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서울역은 몇 달 전 네덜란드에서 엄마 전화를 받고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찍은 곳이다. 위치상 중심이라 막연히 좋을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학교에서 서울역까지는 지하철로 5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역에서 집까지는 더 오래 걸어야 하는 게 함정이었다. 눈 오는 날 썰매를 탈 수 있는 경사는 덤이었다.


나보다 며칠 늦게 도착한 하우스메이트, 친오빠를 마중 나가 집까지 가는 길을 안내했다.

“처음에 모르고 저쪽으로 갔어. 이리로 가면 15분밖에 안 걸리는데.” 

나는 오빠에게 지름길을 알려주며 우쭐했지만, 오르막길은 우리 자취생활의 복선과 같았다.


빌딩숲학교 사진 수강생분의 사진을 제공받았습니다.


4학년이 된 나는 전과 달리 학점을 숨 막히게 의식하며 공부했고 졸업을 못할까 걱정하며 시험을 쳤다. 그러다 서울역에서 집까지 숨도 차지 않고 오르게 됐을 때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자기소개서, 인적성 시험, 면접... 한 판을 깨면 더 높은 산이 있는 코스로 안내받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불합격인 문자를 받았던 밤에는 벼랑 끝에 선 것 같았다.


그 시각, 옆방에서는 요리학교를 갓 졸업하고 상경한 오빠가 이불속에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는 쉐프 꿈나무에서 요식업 비관론자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주방에서 선임에게 일을 배우던 오빠는 군대에 다시 간 것 같다며 나만큼 세차게 머리를 뜯고 있었다. 


내가 대기업에서 중견, 아니 소기업도 좋다고 눈을 낮췄을 때, 오빠는 눈을 밖으로 돌렸다. 요리를 할 거면 임금이 높은 호주에서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해, 출국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후 오빠를 괴롭히는 것은 선임이 아니라 영어 점수였다. 책상을 일찌감치 떠나 주방으로 간 오빠가 영어라니. 십 년 만에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오빠는 오를 수 없는 나무를 쳐다보는 사람 같았다. 그럼에도 때때로 엄마카드로 치킨을 시키며 화이팅을 외쳤다.


실력은 기어가듯 늘었지만, 집의 계약기간이 끝날 갈 쯤에 오빠는 합격점수를 넘었다. 다행히 나도 엄마가 취업을 못 하면 짐을 싸러 오겠다고 선언한 날을 앞두고 직장인이 됐다.


오빠가 호주로 떠난 후, 나는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시간을 잘 체크해 새집을 얻었다. 물론 높은 곳에 있는 집은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르막은 없어도 그만큼의 불편은 꼭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여름에 신나게 계약했던 역세권 집은 겨울에 너무 추웠고, 다음 집에서는 층간소음이라는 괴물을 만났다.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원룸에서 투룸으로, 자취방에서 신혼살림으로 집과 함께 내 사정도 나아졌지만, 평지만 걷는 날은 오지 않았다.


네 번째 집에서 나는 마침내 오르막길 피하기를 체념했다. 대신 오르막길은 절벽이 아니기에 계단을 오르듯 찬찬히 가면 되고, 미끄러진다고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제 발걸음이 경쾌해질 시간이다.


마지막 한 차시만 남겨진 우리의 만남. 내일은 또 어떤 이야기로 나의 눈물샘을 자극할지 기대도 두렵기도 하다. 무더웠던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줬던 나의 수강생에게. 감사인사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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