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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Oct 10. 2019

그래, 우울한 것 조차 나잖아

<조커>, 웃음 속에 숨겨진 광기 어린 슬픔

매일 잠들기 전, 오늘의 나는 과연 행복했는지 묻는다. 아니라고 부정해도 나 역시 행복하기 위해 산다. 결혼을 한 이유도 다른 사람과는 같은 듯 다른 삶의 방식으로 주체적인 행복을 찾기 위해 선택한 결과다. 참으로 주관적인 듯 보이지만, 행복은 극단적으로 보편적이다. 행복의 기준은 위에서 아래로, 입에서 미디어로, 눈으론 볼 수 없지만 나름의 기준이 생겼다.


보통 사람 사이에서 다른, 이상한 사람


사회는 보이지 않는 기준선을 그리며 원을 만들었다. 한 살씩 나이를 먹어가며 나는 과연 다수가 만들어놓은 원 안에 속해 있을지 궁금했다. 혹시 원 바깥에서 유랑자가 될까 매일 불안에 떨며 잠을 설쳤다. 여전히 불면에 시달리는 이유는 원 지름 위에 서서 당장 나를 들여보내 달라 아우성치는 내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난 나은 편이었다. 원에 들어올 엄두도 못 내는 ‘아서’가 너무나 애처로웠다. 그리고 미친 살인의 이유는 우리가 그에게 ‘보통’이라는 기준을 지나치게 강요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서는 보통 사람과는 사뭇 달랐다. 슬퍼도 슬퍼할 수 없고, 미친 듯이 웃어대는 탓에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정신 질환을 가진 그의 꿈은 아이러니하게도 코미디언이었다. 홀어머니 아래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에게 개그란 이 지독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였을까.


웃지 못하는 내 얼굴을 억지로라도 만들어봅니다.


탈출구라 생각했던 개그는 다시 보면 아서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존재 그 자체를 봐 달라는 무언의 움직임, 그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겉모습에 가려져 어느 누구도 그의 진심을 볼 수 없었다. 나와 다름을 직감적으로 느낀 사람들은 그를 피하고 아주 교묘하게 아서를 괴롭히기에 이른다. 항상 행복해라, 웃어야 한다던 엄마의 말이 귀에 맴돌지만 어느 하나 자신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준 적 없다는 사실이 그를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다름의 차이를 차별로 인지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사회는 아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법이 없었다. 거리의 후미진 골목에서, 불빛이 깜빡거리는 지하철에서, 매일 같이 바닥에 쪼그려 머리를 움켜쥐고 얻어맞고 있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그가 무료 상담을 받으러 간 그 자리에서 상담사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결국, 화면 상으로 다른 사람 같아 보이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한 사람, 바로 우리가 휘두르는 폭력에 그는 낙엽처럼 떨어지고 짓밟히고 있었다.


차별은 몸속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위다. 정당화될 수 없다만 나름의 이유를 들어 정당화한다. 정신질환자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사회에 해를 끼치기 때문에 정신병원에 가둬도 된다는 것. 국내에 오는 이주민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나름의 선량한 이유까지. 이렇듯 차별은 무지에서 나온다. 타인의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는 게 바로 차별의 시작이다.


보통과 다르다 인지한 사람은 '내가 아닌 척'을 한다. 분명히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쳤지만 아프지 않은 척, 괜찮은 척, 척을 하다 보면 결국 자아가 실종된다. 슬펐지만 행복해야 했던 아서는 슬플 때마다 웃었다. 몸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처절한 웃음에 나도 함께 목 놓아 울고 싶었다. 지독하게 지친 사람과 미친 사람은 별반 다르지 않다.


변태(변화)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깥에서 온통 얻어맞아 멍 투성이가 되고, 갈비뼈가 튀어나오는 고통이 있어도 견뎌내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엄마. 아서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기를 바라며 침대에 누워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부족한 자신이어도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던 그는, 아빠를 찾아간다. 그리고 의심하지 않았던 엄마의 사랑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 순간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피한 공간은 냉장고.


냉장고에서 알을 깨고 나온 아서는 '조커'로 변태 한다. 분명 아서였을 땐, 힘겹게 계단을 오르며 삶의 의지를 불태웠건만, 조커가 되고 나서는 아주 쉽게 미끄러지듯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우울한 게 싫어서 코미디언이 되고 싶어 했지만, 돌아보니 행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엄마에게 고백한다.


 

항상, 웃는 얼굴을 유지하거라.


"내 삶이 비극일 줄 알았는데 개 같은 코미디야."


우울한 게 죽기보다 싫었다. 우울증 초기를 다시 돌아보면 아서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었던 것도 같다. 무조건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간다. 혼자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으면 우울한 생각에 잠식되어 두려웠기 때문에. 의미 없는 단어를 나열하고 웃는 그들 사이에서 억지로 웃음을 지어본다.


별 의미 없는 하루가 일주일이 지나가고, 일 년이 훌쩍 넘어갔을 때. 그 때야 알게 되었다. 우울한 것조차 나라는 사실을. 그냥 나를 받아들일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을 깨우치는 데까지 딱 1년이 걸렸다. 그렇다. 우울한 것조차도 나잖아.


매일 똑같은 하루가 지나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전혀 아니다. 각자의 시공간 안에 법정을 만들었다. 개인이 모인 사회는 그렇게 약자들에게 옳고 그름이라는 극단적인 기준을 만들어 판사봉을 마음대로 휘두른다. 물론 사회가 평화롭게 돌아가기 위해서 약속된 규범이 필요하다. 하지만, 친절을 가장해 군중 앞에서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는 '갑'이 있는 한, 선량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한 사람을 조커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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