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예지 Dec 17. 2019

내 짐은 내가 질께요?

고민을 다 털어놓을 수 없어서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의 캔디 주제가가 내 대표곡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참말로 싫다. 외로울 땐 좀 울고, 슬플 때는 떼도 좀 쓰면 뭐 어때. 참고 참다 보면 곯아 터지는데 그걸 왜 그대로 방치해서 병에 걸렸던 갈까. 꿋꿋하게 어깨 활짝 펴고 온갖 역경을 헤쳐나가라는 어른들의 말은 너무 가혹했다. 자기들도 힘들 때는 어딘가에 기대고 떼쓰면서 왜 유독 캔디한테만 참으라고 강요하는 건지.


힘들면 힘들다고 떼를 쓰고 징징대고 울어댄 덕분에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회복탄력성이 생겼다. 물체마다 탄성이 다르듯 사람에 따라 탄성이 다르다. 저 밑바닥까지 떨어졌더라도 강한 회복탄력성을 가진 사람은 금세 훌훌 털어내고 다시 돌아오거나 심지어 더 위까지 도약하기도 한다.


그러던 내가 서서히 캔디로 변했었구나


어느새 내가 캔디가 됐다. 우울한 구석이 있는 사람을 조심스레 멀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몇 차례 보고 나자, 불행한 모습은 가면 뒤로 감추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행복총량의 법칙이 있듯이 불행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누가 그랬는데 내 청춘은 왜 이렇게 불행 투성이인 건지. 그냥 물 흐르듯이 지나가면 되는 시간에도 관계에서도 일에서도 고군분투해야만 다른 사람처럼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나였기에 지금 가진 불행을 다 쏟아낼 수 없었다.


우울증 커밍아웃 너무 힘들어.


우울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커밍아웃하게 된 건 더 이상 정신과에 가지 않고 나서부터다. 정신과에 다니는 동안에는 친구들을 만나는데도 큰 에너지가 소모됐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정신과 신체를 무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만나 내 상태를 말하고 이해시키기까지 쏟을만한 힘이 없었다.


몇 달만에 만난 동기에게 내 병명을 말했다. 그리고 정신과에 다녔노라 말했다. 그러자 내 귀로 이상한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예민하고. 잘 울고. 아마 정신과에 다녀와서 그런 것 같아.'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다 의지할 수 없음을 모든 고민을 털어놓는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닌 것임을. 남들은 불행한 나를 그냥 나로 보는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캔디가 되어가다 보니 내 짐을 점점 나 혼자 지고 있었던 거였다. 그 짐을 어깨에 메고 머리에 이고 가던 도중 나보다 더 큰 짐을 진 사람도 더러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는 내가 캔디가 아닌 척 상대에게 타박한다. 지는 못하면서 나도 괜찮은 척 어디다 대고 훈계질이냐고 뭐라 해도 할 말은 없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책임감을 다 떠안고 있으면 안쓰러움에 잠도 제대로 못 들었다.


"말을 해야 알 거 아니야. 혼자 참는다고 뭐 해결되냐?"


나만 힘든 거 아냐. 그렇게 캔디의 연인이었던 또 다른 캔디남 역시 군 입대 후 몸이 아팠지만 괜찮은 척 연기를 했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그에게 틀에 박힌 생활 패턴은 생각보다 어려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캔디는 또 다른 캔디를 알아볼 수 없었다. 참는데 온 에너지를 다 썼기 때문에. 나 역시도 그의 빈자리가 아팠음에도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해내야 했다. 나만 힘든 게 아니고 모두가 다 해낼 수 있는 무엇이었다.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모두가 힘들잖아요."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똑같이 다 힘들단다. 그러니까 너만 불행하다고 찡찡대지 말고 긍정적으로 살아라는 가사. 제목도 가사처럼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의 임계점이 다 똑같지는 않다. 불행함을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 다르고, 예민한 정도도 다 다르다.


다수가 말하는 불행에는 평균이 없다. 평균의 불행이라 말하는 기준이 없다. 평균의 삶이라고 통칭할 수 없듯 말이다. 오롯이 나 혼자 해결하도록 참아내라 인내하라 강요하는 한국형 캔디는 또 다른 우울증 환자를 양성할 가능성이 있다.


행복해지고 싶어요


앞서 회복탄력성을 말했던 이유가 있다.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불행과 행복의 두 가지 기로에 놓일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원래 내게 불행은 그냥 온전히 불행 덩어리였다. 그냥 돌덩어리같이 바꿀 수도 없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쓸모없는 무언가였다.


캔디가 된 이후 말로는 불행을 전달할 수 없어서 불행을 자꾸 글씨로 써본다. 불편하다. 불행하다. 서운하다. 섭섭하다. 불행에도 유형은 다양했고 그 유형에 대해 글을 쓰며 분석해보면 또 다른 이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불행에도 제각각 모양이 있었던 거다.


불행에 의미를 다시 부여해보자. 지금 그 불행을 느낀 이상 표현되지 않으면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내 무의식 속에 쌓인 그 불행은 호시탐탐 내 밖으로 빠져나올 기회를 엿본다. 그러니까 그냥 내 불행을 잘 지켜보자. 나 혼자의 힘으로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냐고?


안녕 빨강머리앤!


그냥 캔디 대신 빨강머리앤이 되보기로 한다. 굳이 내 짐은 내가 다 이고 지고 갈 필요가 없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한 번 부탁하고, 잠깐 에너지를 비축해뒀다가 짐을 덜어놓을 곳을 찾아보자. 아주 가끔 또 다른 사람의 불행을 들었을 땐 비어 있는 어깨에 있던 그 사람의 짐을 잠깐 매 주면 되는 거다.


빨강머리앤은 말했다. “사람들은 감성적이라고 수군거리겠지만 나는 삶이 주는 기쁨과 슬픔, 그 모든 것을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마음껏 느끼고 표현하고 싶어요.”라고.


불행을 정리할 공간을 찾기 전까지만 생각하고 말할 시간을 주자. 그러니까 제발 친구의 불행을 들었을 때, 나 스스로 재단하는 건 이제 서로를 위해 이 정도로 해두는 걸로 하자. 참고 또 참는 캔디대신 화 날땐 화도 내고 가끔 크게 울음도 터뜨리는 빨강머리앤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그래, 우울한 것 조차 나잖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