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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Mar 12. 2020

남이 바라는 나, 내가 바라는 나

자기소개서를 쓸 때 느꼈던 점

취업을 준비하던 당시, 꽤나 무기력했다. 자기소개서, 1차, 2차 많게는 3차 면접까지. 배가 되어 불어나는 기대만큼 탈락의 아픔은 쓰라렸다. 언젠가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부모님께 빨간 내복을 사 주겠다는 다짐은 내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탈락 이후에 내 심장은 딱 부푼 만큼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고, 아팠다.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숨 쉴틈 없이 이어지는 취업 트랙 안에서 지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바쁘게 달렸던 것 같다. 아주 찰나의 순간, 또다시 트랙 준비선에 서는 그때, 무기력은 갑작스레 찾아온다.


일을 시작하면 손에 쥐어지는 성과가 있어야 보람을 느끼며 일을 지속할 수 있는 건 나뿐만 아닌 것 같다. 일취월장, 완벽한공부법, 일공부력 같은 책은 여전히 베스트셀러로 사람들에게 읽히니까. 그런데 일을 시작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면. 내가 원하는 성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면접관의 '마음'에 쏙 들어야 했다. 규격화된 정장을 입고 뾰족구두를 신고 경쟁자들 중에서도 특히나 '말 잘 듣는 사람, 일 잘하는 사람'으로 보여야만 했다.


자기소개서를 쓰며 '나는 누구일까' 생각한다


심지어 회사마다 비전이 다르다. 그들이 원하는 인재상에 맞춰 나를 변형시키는 게 키 포인트. 그냥 잘 굴러가는 차에서 최고의 로봇으로 트랜스포머 해야 한다는 거다. 인재상이 맞지 않으면 '우리와는 가치관이 맞지 않으니 여기까지 입니다.' 하며 손을 놓아버리는 탓에 혼잣말이 늘었다.


키보드가 없었더라면 오른손 중지에는 굳은살이 박여서 없어지지 않았겠지.


"잘할 수 있다고. 잘 맞출 수 있다니까?"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특히 인사팀 담당자들이 나에게 사랑에 흠뻑 빠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꾸 나를 숨기고 나 자신의 모습을 외면했다. 자기소개서 100선을 보고, 면접 필독서를 읽어보고, 아주 가끔은 인사 담당자를 만나기도 하면서 그들의 기준에 맞춰 나를 깎고 다듬었다.


쓰는 활동을 사랑해서 대학 생활 내내 기자단 활동을 했다. 자기소개서를 쉽고 빠르게 썼지만 영혼 없는 글은 금방 들통나는 수밖에. 진심으로 이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보다는 명확한 단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어른의 역할을 다 하는 것.'


졸업을 한 사람이라면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해야 어른으로의 역할을 다 한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길은 모색해보지 않은 채 그저 사회가 바라는 나, 남이 바라는 나의 모습을 나에게 강요했다. 그렇게 무기력은 찾아왔다.


나는 누구일까. 나를 위한 빈자리가 하나쯤은 있는 걸까.

150번째 자기소개서를 쓸 때쯤이었던 것 같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읽었다. 하도 뼈 때리는 말을 많이 해서 읽고 나서 충격에 빠져 써야 할 자기소개서 5개를 그냥 날렸던 날이다. 저자인 에리히 프롬은 내게 여러 가지 말을 했는데 그중에서 기억나는 걸 몇 가지 꼽아보자면,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판다."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있다."


현대인들이 고독과 무력감을 해소하기 위해 남들처럼 같은 삶을 사는 것으로 외부 세계와 단절되지 않으며 노력한다고 말했다. '모두가 똑같아지는' 획일적인 삶을 우리도 모르게 추앙하고 있다. 남이 바라는 나의 모습을 나에게 투영한다. 그리고는 그게 나라고 목청껏 외쳤다. 그렇게 자기소개서를 쓰며 나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 팔면서 무력감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나로 살아가는 법


남이 바라는 나로 글을 썼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 데카르트는 내 앞에 사물이 있더라도 불완전한 감각으로 그게 진짜 거기 있는지 의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만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젠 남과 다른 나의 삶을 살고 싶다. 물론 앞선 선배들이 몇 명쯤은 존재하지만, 그들과는 차별화된 나만의 이야기로 사람들을 울리고 싶다. 에리히 프롬이 '자유는 진짜 인격의 실현이다.'라는 말을 했던 것처럼 내 인격의 실현은 바로 공감능력의 고양이다.


내가 바라는 나로 살고 싶어서 바쁘게 살면서 이제 무기력보다는 외로움과 싸움이 시작됐다. 묵언수행과 함께 내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과거에 나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계속 생각하고 또 질문하는 그 지겨운 질문과 답. 다시 혼잣말을 하며 외로움을 이겨내려 한다.


글을 쓰다가 가끔은 돈을 벌어야 하니까 강의를 하러 나가면 새롭게 리프레쉬가 되는 것도 싶다. 학생들이 내게 묻고 나는 답을 해준다. 대부분 자신들의 미래가 궁금하거나 글 쓰는 스킬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려 묻는데 한 친구의 돌발 질문에 1분 정도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세요?"

"어..... 음...... 아......"


그냥 선생님인데, 아닌가. 아.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내가 바라는 나로 살고 싶은 사람. 의식의 흐름대로 대답했다. '내가 바라는 나로 사는 사람.' 분명 다음 질문은 이거다. '에이, 그게 뭐예요?'


"글 짓는 사람. 글 짓는 목수. 그리고 너네가 글을 썼으며 좋겠어 선생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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