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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Mar 31. 2020

글머리가 사라졌다

내 글머리 어디 갔지

큰일이다. 브런치에 글이 올라간 지 딱 2주가 됐다. 할 말이 많은데 입 안에서 빙빙 맴돈다. 오랫동안 말을 못 해서 입냄새가 나는 것 마냥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뭐가 문제지. 무슨 문제 때문이지. 매일 밤마다 나를 탓하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쓰지 못한 단어가 자꾸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녀서 덜어 놓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 됐다.


며칠 전 엄마에게 전화했다. 코로나로 인해하던 일이 멈춘 엄마의 건강이 염려되었던 탓에 이것저것 묻다, 한 방 맞았다. 글도 뜸해지고, 게다가 글 양도 줄었더라? 양이 중요한 게 아니야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도 없었다. 요즘 나에게 빈번하게 실망하고 있었으니까.


키보드 커서가 깜빡일 때마다 손바닥에 한 방울씩 땀이 차오른다. 오분쯤 지나고 나면 흥건해진 손이 보인다. 맘에 가득 찬 눈물 같다. 10분이 지나면 모니터가 자동으로 어두워진다. 까맣게 변한 모니터 안으로 일그러진 내 얼굴이 보인다. 오늘도 실패했다. 결국 또 편두통이 심해져서 침대에 누워 흰 벽을 바라본다.


모니터 화면처럼 내 머리도 블랙아웃이다.


강의할 땐 그렇게 잘만 말해놓고서


“글을 어떻게 시작할지 모르겠어요 쌤.” 내가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이다. 그때의 나로 다시 돌아가 보자. ‘하고 싶은 말을 써보세요.’ 정말 성의 없었던 답변이다. (그때 왜 그랬을까... 죄송해요...) 한 두 달 강의를 지속한 이후에 내 답변이 불현듯 기억났다. ‘불평을 써 내려가 보세요. 하루에 불평할 거리가 생각보다 엄청납니다.’


꽁꽁 담아둔 불평을 털어놓자면 ‘사람들을 보고 싶다. 외롭다. 일하고 싶다.’ 지금 나의 불평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약속한 이상 모두의 이야기다. 옆에서 기침을 하면 다정한 손길을 쓰다듬던 우리는 이제 멀치감치 떨어져 서로를 지켜볼 뿐이다.


1분마다 400시간의 영상이 올라오는 세상이다. 볼 영상은 차고 넘친다.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에 검색어를 입력한다. 그리고 필요한 정보를 습득한다. 나 역시 최근에 요리를 시작하면서 백 선생님의 채널을 구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글은 읽히고 있고 그와 더불어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굳이 글을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을까


우리는 글을 왜 읽을까. 불안하거나 답답할 때 서점에 간다. 그리고 그럴 듯 해 보이는 책을 골라 편다. 내 상황과 정확하게 매칭 되는 책은 10권 중에 1권뿐이다. 상황이 미묘하게 달라도 차분히 스토리를 따라가면 어느 순간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영상은 직관적으로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다지만 글은 눈을 거쳐 머리 안에서 그리고 마음으로 총 세 번의 필터링이 필요한 고난도 작업이다. 이렇게 몇 단계를 걸쳐 마음으로 스며든 글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다.


여러 가지 책을 읽어서 두루 생각하면 얼마나 좋은가

그렇게 글을 읽는 행위는 사유의 시작이다. '사유'의 뜻은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이다. 이 작업을 통해 한 면에서만 보는 게 아닌 반대편 입장도 두루 살필 수 있다. 두 번째 뜻에서 이를 확실하게 이해해보자. 한 문장을 읽더라도 나의 상황에 따라, 개념화하고 문장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나의 문제에 맞춰 상황을 풀이하고 추리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개념,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


같은 상황이더라도 누군가는 내 편이 될 수가 있다. 아니면 반대편의 입장에 서서 맹렬히 비판할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 나의 상황이나 감정상태, 분위기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감정을 뒤로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하지만 나 역시 사람인지라 눈 앞이 뿌옇게 흐려질 때가 몇 번 있다. 일이 없었던 지난달, 일주일 정도 내가 원하는 영상을 찾아보고 유튜브에서 추천해주는 영상까지 보게 되니 다섯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놀랍게도 주제는 단 한 가지였고, 나의 주장을 더욱 확고히 해주는 이야기였다. 한눈에 나의 주장을 정리해주는 탓에 기쁘기도 했지만 무서워졌다. 확증편향이었다.


글머리를 다시 찾아오는 방법이 있었나


불행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돌아보니 행동하지 않음이었다. 실천해야 했지만,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 핑계로 침대와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누워서 하는 행동은 모두가 상상하다시피 텔레비전을 배경음악 삼아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는 것. 소셜 미디어의 스크롤을 내리며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배 아파했다. 두렵더라도 마주할 용기가 필요했다.


한 손에는 펜을 들고 반대 편에는 종이책을 폈다. 읽으면서 여백에 메모하고 생각을 착상하고자 했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틈틈이 들고 다니며 읽고, 자기 전에도 읽으면서 새로운 생각 열매가 무르익기를 바란다. 메모를 다시 넘기다 보면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다. 그렇게 펜을 손에 쥐고 느린 글쓰기를 하는 것은 머릿속에 생각을 단어로 정리하게 되면서 문장이 정리되는 순간 희열이 느껴지게 된다.


읽기만 하면 뭘 하겠는가. 결국 읽고 써야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초반에는 글쓰기의 동력은 읽기라고 믿었다. 나의 행동을 되짚어보면 글을 읽는 게 끝이 아니었다. 작가 장강명의 말을 빌자면, '글쓰기의 동력은 당대의 이슈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으면서도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본다. (생략) 책을 읽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다.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공동체를 아끼게 된다. 나 역시 글자 공동체 속에서 이 공동체를 아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유가 시작된다고 해서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완결은 보고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이었다. 다시금 나의 글머리가 스멀스멀 찾아오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모니터 안에 키보드 커서를 멍하니 바라보는 게 아니라 종이를 펼치고 물음표를 그리는 작업이 선행돼야 했다. 읽기만 하면 내 안에서 사유의 작용만 하고 끝날뿐. 써야 나의 것으로 만들고, 내 입말로 표현해야 누군가에게 전달할 파워가 생긴다. 글머리는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부터 발현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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