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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Dec 29. 2020

내가 요리를 하는 이유는 말이야

그의 말에서 눈물을 흘렸다


먹는 걸 좋아하지만 요리는 싫다. 재료를 준비하고 이를 손질하는 과정. 그 과정이 생각보다 내겐 큰 노동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의 남편은 요리를 좋아하는 편이다. (요즘에는 집에서 전적으로 요리 담당이 되어서 싫어졌다고는 하지만!) 본인이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움이라나?


남편 덕분에 요리 프로그램을 챙겨보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골목식당 그리고 올리브티비에 나오는 새 프로를 챙겨보는 남편 옆에서 가만히 앉아 꾸역꾸역 보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지고 그들의 칼질에 넋을 잃게 됐다. 아마도 내가 익숙하지 않은 영역에서 멋진 그들을 보면서 "난 언제쯤 저 정도 전문가가 될까?"라는 생각에 잠기게 되는 것 같다.


현실이 너무 퍽퍽한 탓일까. 드라마로 잠시 현실도피를 했다. 넷플릭스를 켠 채로 일을 했다. 물론 일에 집중하기보다 드라마 주인공과 대화를 나눈 시간이 길었다. 단순노동과 함께 드라마 두 편을 정주행하고 나자 한 템포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했다. 콘텐츠 선택권을 남편에게 미뤘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타석에서 홈런이 연달아 나왔다.


나의 모든 것이 부정당했을 때의 속상함이란


영화 초반, <아메리칸 셰프(2014)>칼 캐스퍼 옆에는 항상 좋은 말만 해 주는 직원들이 옆에 있었다. 10년째 같은 주방에서 같은 요리를 하는 그에게 어느 날 비평가 한 사람이 찾아왔다. 결국 진부한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평가의 혹평에 자존심이 박살난 그는 주방장에서도 잘리게 된다.


셰프인 그에게 요리는 그 자신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혹평 앞에서 무너진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 않고 비평가 앞에서 악다구니를 쏟아냈다. 그 악다구니 덕에 유명해졌지만 아무 곳에서도 그를 셰프로 찾아주진 않았다. 와르르 무너진 자존감을 높여보겠다고 재료를 꺼내놓고 요리를 하는 그를 보며 지금 내 모습이나 진배 다를 게 없었다.


그의 악다구니가 한 편으론 부러웠다


작가님이라는 말을 듣는 게 원래 쑥스러웠다. 그래도 작가라고 불리는 게 좋다. 사실 지금은 작가라고 불리는 게 부끄럽고 욕심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기획하랴, 멘토링 하랴, 2순위로 밀쳐뒀던 글을 써 보겠다고 책상 옆에 쌓아둔 책들을 멀찍이 바라보며 '어떤 재료부터 요리하면 좋을까' 망설이는 그의 모습에서 나를 찾았다. 조금씩 쌓아가던 나의 자신감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상황 때문에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요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지만 방법을 찾았다. 푸드트럭. 고물 푸드트럭을 인수받아 아들과 함께 구석구석 때 구정물을 닦는 그의 모습에서 준비하는 자의 태도를 보았다. 스텐이 제 색을 찾아가던 중 냉장고 안에 오랫동안 묵혀뒀던 음식물 쓰레기를 마주한 아들과 그는 처음으로 언쟁을 높인다. 너무 더러운 음식물 쓰레기를 본 아들은 재료와 통을 버리겠다고 하지만 셰프는 꼭 필요한 거라며 반대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닦는 과정 역시,
요리하는 데 중요한 준비 과정이란다."


죽어도 싫다고 하는 아들에게 설득의 미덕을 보여주는 현명한 아빠


모든 일도 일련의 과정이 필요한 거였다. 그냥 공간이 다 만들어졌다고 해서 오픈을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공간에 올 사람들에게 더 좋은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서 콘텐츠를 채워 넣는 시간. 그리고 가장 기본인 공간을 깨끗하게 정돈하는 일까지.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작업이 결국 완성품을 맛보는데 꼭 필요한 작업인 것임을 그는 아들에게 찬찬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분명 사소한 일은 없다. 완성품이 나오는 데까지 여러 단계가 필요한 것이다. 셰프의 말에 비하면 요리를 하기 위해서는 구석구석 묵혀두었던 구정물을 닦아야 하고, 도구를 쓸 수 있도록 제자리에 내버려 두어야 하며 무엇보다 좋은 재료들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 지금 내 마음속에 묵혀둔 구정물을 열심히 닦아줘야 하고 도구들을 잘 쓸 수 있도록 잘 배치해야 한다. 목구멍에 콱 막힌 가시가 빠져나오질 않았다.


내가 요리를 하는 이유는 말이야


셰프는 이미 성공한 사람이었다. 푸드트럭을 시작한다고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에게 말하자 한 달음에 달려와 함께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자존감이 바닥을 친다고 하더라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아들에게 셰프의 태도에 대해 말해줄 때 '수석 셰프를 했던 이유가 여기 있구나.'라고 감탄할 수밖에.


푸드트럭을 처음 개시한 시간. 트럭 안에 주방 기구들을 설치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무료로 샌드위치를 나눠 줄 때, 아들이 식빵을 태웠다. 그를 본 셰프는 그에게 말했다. "이 식빵이 탔지 않니. 이건 손님들에게 주어선 안 되겠지?" 대수롭지 않게, "무료로 주는데 그게 뭐 대수예요?"라고 말했다. 그때 푸드트럭 밖으로 나와 힘주어 말하던 그의 말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나도 거기서 힘을 얻어.


"난 사랑해. 내 인생의 좋은 일들은 다 이 일 덕에 생겼어. 내가 뭐든지 잘하는 건 아냐. 난 완벽하지도 않아. (생략) (주방을 가리키며) 하지만 이건 잘해. 그래서 이걸 너와 나누고 싶고 내가 깨달은 걸 가르치고 싶어. 요리로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고 나도 거기서 힘을 얻어. 너도 해보면 빠지게 될 거야."
"네, 셰프"


돌아보면 나 역시 글 쓰는 걸 사랑하고 좋은 일들은 다 이 일 덕에 생겼다. 분명히. 내가 뭐든지 잘하는 것도 아니고 완벽한 것도 아니다. 덤벙대서 결국 쓸데없이 백만 원 정도의 지출이 생기기도 했지만, 지금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쓰기와 나의 콘텐츠를 만드는 작업을 통해 사람들에게 '나의 삶에 대한 위로'를 주고 싶다. 그를 통해 나 역시 삶의 원동력을 얻게 되니까.


사랑하는 것이 있는 삶



영화를 본 시간은 밤 열두 시 반. 내일 일찍 일어나더라도 한 편의 글을 끝내야겠다고 책상에 앉았다. 쓰는 순간에도 느낀다. 익숙한 풍경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지난해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면서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한 편의 글을 완성하며 느꼈던 그 희열. 글을 보면서 나의 이야기로 인해 나 스스로의 '고민'을 다시 들여봤다고 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것이 있는 삶이란 갑작스러운 충돌이 있더라도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관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제일 사랑하는 행위인 글을 쓰고 글로 말하는 삶을 놓치지 말아야지. 그렇게 나의 완충지대를 더 폭신하게 만들기 위해 쓰고 또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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