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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Apr 16. 2021

배와 같이 내 마음도 가라앉았다

그 날 이후 청춘을 지워버렸다는 그들, 세월호 7주기

이 글을 쓰지 않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쓰는 동안 내가 온전한 정신으로 글을 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몇 번이고 그 날로 돌아가 멍하니 키보드 커서를 바라본다. 그래서 지금 해결된 게 뭐가 있지?


문제는 풀라고 있는 거란다. 엄마는 습관처럼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이과를 갔어야 했는데. 수학을 그렇게 좋아하는데 말이야.” 수학이 왜 좋냐고 물어보면 “답이 있잖아. 푸는 과정도 있고 그리고 답도 있고.” 사고가 생겼을 때도 수학 문제처럼 답이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저는 의심병 환자가 되었습니다


내 마음이 심연으로 가라앉은 건 7년째. 나만 그랬을까.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뒤덮은 건 무력감이었다. 눈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무력감. 그래도 우리의 대표라는 사람이 무능력하게 사고를 방치할 때 느꼈던 그 패배감. 배가 가라앉은 4월 16일. 그 날 이후 나의 삶은 조금 바뀌었다. 매사에 긍정적이었던 내게 의심병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왜 이 날이면 어김없이 비가 내리는 걸까


첫 번째,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모든 사람들은 다 선한 마음이 있을 거라고, 그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나에게 ‘선함’이 작동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시간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 부모님들이 광화문 집회를 하던 어느 날. 일베 회원들이 모여 피자를 먹는다고 했다. 화부터 나고 어찌할지 모르던 그때. 나의 친구는 그들 앞에서 말했다. “여기서 왜 피자를 드시는 거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진 못할망정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죠.” 그리고 내 친구는 한 달 정도 바깥을 다니는 걸 두려워했다. 신상이 털릴까 무서워하고 누군가 나를 알아보는 게 무섭다고 말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얼마나 힘든지 조금만 생각해봤더라면 아니 내 가족들이 그런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했다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타인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공감은 분명 다각적으로 이 세상을 파악할 수 있게 만든다.


두 번째, 저 결과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희생되었을까. 효율성을 위해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했다. 최소한의 원재료 투입으로 최대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도록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었다. 당연하게 배에 실을 수 있는 용량보다 훨씬 많이 적재하고(세월호), 약화된 철골 구조물 그리고 절대 할 수 없었던 증축까지 감내하며(삼풍백화점) 차곡차곡 부실을 쌓아갔다.


끝까지 풀어볼 걸. 인내해볼 걸.


수포자가 되기 전까지 오답노트를 썼다. 다시 문제를 풀어본다고 노트를 열면 신기하게도 같은 문제를 틀렸던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원인을 알고 보면 다음 시험에서는 정답으로 변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오답노트를 열심히 써도 정답을 맞힐 수 없었다. 원인을 파고 들어갈 끈기도 그럴만한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일 큰 문제. 수학은 정말 재미가 없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오답이 정말 많다. 오답을 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매달린다. 각자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며 원인을 찾아간다. 신기하게도 개인의 경험에 따라 풀이과정은 제각각이다. 내가 살아온 환경, 보고 듣던 이야기, 그렇게 나를 구성한 사고방식들이 나를 만들어 나만의 오답노트를 만들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처럼 우리는 재미없는 문제는 뒤로 젖혀두거나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은 결국 포기하기에 이른다. 수학과 사고는 다른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왜 수학을 쉽게 포기했을까. 조금 더 풀어볼걸. 끈기 있게 해내 볼걸. 그럴만한 환경이 주어졌더라면 해낼 수 있었을까. 삼풍백화점, 대구지하철, 그리고 세월호까지. 어느 하나 끈기 있게 사고의 원인 규명을 하지 못하고, 책임자를 찾아낼 수 없었던 우리들.


나도 지우개가 있었으면 좋겠다


“가만히 있으라.”

세월호 선장이 했던 말은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책임자가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그 말을 믿었던 우리들. 정작 더 상황은 악화되고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도 끝까지 기다리는 한국 사람들. 피해자 가족들은 반대로 “내가 뭔가 가만히 있으면 되질 않겠구나.”라는 말을 하게 됐다. 제대로 된 사고 조사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은 가족들을 잃은 아픔을 치료할 여유 없이 사회 문제를 해결할 당사자가 되는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투쟁가가 된 그들을 작년에 만났다. 엄마의 마음으로, 아빠의 마음으로. 자신과 같은 부모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전히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고 있었다. 지금껏 투쟁해도 돌아오는 건 비난, 벽을 향해 말하는 것 같단다. 대화가 아니라 그냥 말이었던 것이다.


벽에다가 대고 소리쳐서 다시 나에게 돌아올 때 그 좌절감이란.


“멘토님. 그 날 이후로 제 마음엔 지우개가 있어요. 최악의 날을 지워버리는 거예요. 근데 지우개로도 지울 수 없는 게 있더라고요.” 괜찮다고 말을 하며 해맑은 얼굴로 얘기하던 그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 한동안 죄책감이 본인의 몸을 지배했다고 말했다. 멘토링을 하던 그 시간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 그들의 말을 쌓아 봉인해두었는데 자꾸 말들과 표정이 생각난다.


학교 다닐 때가 제일 마음이 편안했던 것 같다. 선생님들이나 부모님들이 좋은 성적을 강요하시긴 해도 분명 과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과정을 대하는 태도를 알려주시기도 했었고. 무엇보다 나에 대한 그리고 작은 학급이라는 사회를 책임져주셨으니까.


내가 아이를 낳았을 때, 내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분명 한계가 있다. 지금처럼 세상이 책임지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내 자녀를 잃을 수도 있고, 그렇게 투쟁가로 전면에 설 수도 있겠지. 문제를 정답으로 만들기 위해선 과정을 잘 확인해야 할 텐데. "저는 그 날 이후로 저의 청춘을 지웠습니다." 그렇게 바다 아래에 가라앉은 나의 자녀와 그들의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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