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에서 파나마로
채리에게
오늘은 5월 5일 어린이날이야. 휴일의 개념이 없는 프리랜서지만 오늘은 왠지 휴일처럼 보내고 싶어서, 이른 점심으로 짜장면과 짬뽕을 시켜먹고 낮잠을 늘어지게 잔 다음, 영화 2편을 몰아보고 20분 동안 홈 요가를 했어. 그리곤 또 떡볶이를 배달시켜먹은 뒤 배를 두드리며 노트북 앞에 앉아있어. 요즘 일상이 너무 반복이라 쓸 말이 없다고? 그럴 순 없어! 너는 매일 다른 메뉴의, 그것도 근사하게 잘 차려진 '남편의 식단'으로 밥을 두 끼쯤 먹었을 테고, 시호의 배밀이가 날로 늘어나 요가 언더독 자세를 하기에 이르렀지? 내가 인스타그램으로 다 - 지켜보고 있다. '답장은 도대체 언제 쓰나...' 하면서 말이지. 블로그에 글을 쓰진 않지만, 네 포스팅은 놓치지 않고 보려고 하고 있어. 네가 사진과 함께 올리는 일상의 기록들은 보는 재미가 꽤나 있거든. 아무래도 브런치에 쓰는 편지와 블로그의 기록들이 겹치다 보니 쓸 말이 더 없어지는 것일까? 나처럼 혼자 인 사람보다 세 사람이 함께 사는 집에 있는 너에게 같은 매일은 없을 테니 파나마에서의 특별하지 않은 일상 속 소소한 이야기들을 전해주길 바라. 그리고 뭐 어때, 나는 너와 쓸데가 없는 술 이야기, 운동 이야기 따위만 해도 재미있는걸?
내가 요즘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는 건 '선택과 집중' 때문이야. 네가 언젠가 내가 카페를 할 때였나, 무엇 하나를 관두려고 마음먹었을 때 그런 말을 해주었지. 선택과 집중의 시기라고 말이야. 그때 사실 난 무엇 하나를 포기하는 기분에 휩싸여서 열패감이 상당했었는데, 선택과 집중을 위해 무언가를 놓아주는 일도 꽤나 과감해야 하는 구나를 새삼 깨달았어. 그 이후로 이 말을 참 좋아하게 되었단다. 그래서 어차피 글을 꾸준히 쓸 거라면 글을 위한 포맷이 잘 만들어져 있는 브런치로 갈아타기로 마음먹었지. 선택과 집중을 하느라 일보단 글쓰기에 집중하며 지낸 지 5개월이 되었어. 어제는 소설 기획단계부터 옆에서 봐주었던 기획자분과 소설 전반적 리뷰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계약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의했어. 거의 일 년 중 절반을 큰 수입 없이 입에 풀칠을 하면서 견뎌왔던 시간들의 결실을 맺는 날이 가까워져 온다. 내가 언젠가 편지에 그런 말을 쓴 적이 있지? 자기 밥벌이를 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라고. 나는 얼마간 밥벌이를 못하고 있어서 쓸모없는 인간처럼 느껴지기도 했었거든. 글을 쓰는 일이 보상을 기대하고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니까,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많이 나약해지더라. 큰 보상은 아니겠지만, 첫 번째 소설로 얻게 되는 수입이니 나에겐 꽤나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많이 설레고 있어. 좋은 소식 생기면 꼭 전할게.
네 편지를 받고 '파리넬리'란 영화를 봤어. 난 변성기가 오지 않도록 거세를 하는 점 보다도, 거세를 해도 남자의 성기가 발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버렸단다. 거세를 하면 섹스라는 행위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행위는 가능하나, 사정을 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형이 대신 동생의 여자에게 임신을 시키는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달까. 음악, 목소리가 참 아름답더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작년에 오페라를 보러 갔어. '나비부인'이란 오페라였는데 아름답고 웅장하고 경이롭기도 하였지만 아무래도 아직 나의 문화 예술은 조금 더 직접적인 감흥을 원하나 봐. 어렵더라고. 뮤지컬을 소름 돋아하는 사람도 많던데 비슷한 맥락이랄까. 어쨋든 영화는 야해서 좋았어. 난 야한 영화 좋아하거든. (?ㅋㅋ)
한국은 요즘 코로나가 점점 잠식되는 분위기야. 사회적 거리두기도 생활 속 거리두기로 완화되었고, 슬슬 야외활동도 시작하고 상점이나 거리에도 활기가 돌기 시작했어. 파나마는 언제쯤 위험 강도가 낮아져 와인을 팔고 타국민들의 입국을 허용할까? 불확실한 미래이긴 하지만, 내년 중반기가 지나서 파나마를 가보면 어떨까란 생각을 하고 있어. 시기가 좋아지면 구체적인 계획도 한번 세워보면 좋겠다. 내가 좋아할 것 같은 동네라거나, 식당 같은 것들 말이야. 미리 많이 생각해줘.
오지 않을 것 같은 막연한 희망과 기대는 여행욕구를 더욱 증폭시키거든 :)
그럼 오늘은 20000.
ps. 안 바쁠 때 답장 좀.
연남동에서 도연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