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에서 파나마로
채리에게
지난 편지 이후로, 네 답장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혹시 알람을 놓쳤을까 브런치를 껐다 켰다 했어. 내가 얼마나 우리의 펜팔을 좋아하는지 알겠어? 알겠냐고! 그런데 이번엔 내가 답장이 많이 늦었지? ㅎㅎ 너-어-무 바빴어!
그동안 너는 시호를 데리고 수영장을 가고, 부부모임을 하던 날들의 이야기를 (그날 스페인어는 유창하게 잘 나왔는지) 블로그로 미리 확인을 해버렸지 뭐야. (김샜다~) 너는 내 친구지만(?) 스페인어를 한다거나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걸 보면 저 세상 사람(?) 같은 기분이 들어. 파나마로 가서 네가 그곳 사람들과 일상 대화를 하고 생활을 하는 걸 보면 얼마쯤의 경외심이 들 정도라니까. 성장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언어들이겠지만 그래도 넌 정말 스페셜 한 사람임은 분명한 것 같아.
너 역시 내 인스타로 소식을 접해버려서 편지로 "서프라이즈~!" 하면서 얘기할 순 없게 되었지만, 내가 유부녀가 되었어. 자세한 이야기를 잘 모르는 친구들은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에 반응이 아주 다양했어. 예를 들어 이런 식.
"나 결혼했어."
"낮술 했어?"
"임신했어?"
왜 여태 얘길 안했냐고 서운해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는데 이렇게 대답해줬지.
"너무 서운해 말어. 울 엄마도 어제 알았어."
혼인 신고 전날에 대구에 갔어. 우리 집은 결혼을 안(or못)할 것 같던 도연이가 결혼을 한다고 잔치집이었어. 할머니 엄마 이모 다 눈물바다가 되었어. ㅋㅋㅋ 거의 페스티벌이었지.
채리 너도 알다시피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결혼을 하길 오랫동안 바라왔던 사람이야. '남들이 다 하는 건 하기 싫다' 이런 생각도 아니었고, '다 허례허식이야. 돈 아까워!' 같은 생각도 아니었어. 그냥 나는 결혼이란 것을 '나 답게' 하고 싶었어. 나 다운 선택이라는 것의 정확한 정의는 내릴 수 없지만... 솔직히 말해서 귀찮은 게 싫어. (신념 같은 게 아니라 귀차니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면 다들 어이없어할 것ㅋ) 다행히도 신랑이 이런 확고한 나의 생각에 동의해주었고(그도 만만찮은 귀차니즘 환자) 그렇기 때문에 우리 결혼이 더 쉽고 빨라진 것인지도 모르겠어. 그동안 인제에 마음에 들었던 집을 계약했고, 인제의 면사무소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기념사진을 남겼어. 내년 봄엔 집 앞마당에서 소박하게 가족식을 치르기로 했고 말이야. 이 정도면 나 다운 선택인 것 같아.
혼인신고를 하고 부부가 되었지만 내가 출근을 해야 해서, 당분간은 주말 부부로 지낼 참이야. 내년이 되면 인제 집으로 본격적으로 이사를 할 텐데 이사 가서 집을 좀 정리하고 나면 사진 많이 보여줄게^^ 네 말처럼 인제의 두 A형들은 같이 살면서 어떤 사소한 문제로 트러블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감히 예상해보건대 너랑 별반 다르지 않을 듯싶다...
채리가 한국에 오는 게 빠를지, 내가 파나마로 가는 게 빠를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다음 만남엔 나의 '신랑'과 함께 일 테야. 내가 벌써 파나마에 있는 나의 친구에 대해서 자랑을 잔뜩 늘어놓았거든. :-)
다음 편지에는 통행제한이 풀린 파나마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길 기다릴게~!
그럼 이만!
ps. 안 바쁠 때 답장 좀.
연남동에서 도연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