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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채리 Oct 10. 2020

가족 없으면 서러울지도 몰라, 중남미.

-파나마에서 연남동으로

도연에게.


답장이 많이 늦었지? 미안!!

우리의 편지 마무리 추신이 언제나"안 바쁠 때 답장 좀."이잖니? 비빴단다. ㅋㅋㅋㅋㅋ


파나마의 통금이 풀려버렸어. 격리 생활 동안 안 나가는 게 익숙해져서 집순이 타입도 아닌 내가 이렇게 마트도 안 나가고 일주일, 열흘씩 집에만 있는 게 좀이 쑤신다거나 답답해서 미쳐버리겠거나.. 그런 외출 금단현상(?)이 없는 것이 퍽 신기했는데 말이야, 역시는 역시라고! 통금이 풀리자마자 나는 집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어ㅡ 그래 봤자 아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서 대체로 사람 없는 이른 아침의 공원 산책, 차에서는 한 발자국도 내리지 않는 초저녁의 드라이브.. 정도지만. 아! 오늘은 용기를 내서 쇼핑몰에 다녀왔지. 티셔츠를 사야 했는데, 시호를 데리고 가느라고 우리 집 바로 근처에 아주 크고 핫하고 근사한 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붐비지 않고 한산한 곳으로 가기 위해 일부러 저 멀리에 있는 '손님이 이렇게 없는데 이 몰은 어떻게 유지가 되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그런 몰에 다녀왔어. 시호가 마스크를 너무 안 쓰려고 해서 마음이 불안한 거야~ 부랴부랴 티셔츠 한 장만 사서 돌아왔어. 몰에 갈 땐 혼자 가야겠구나.. 생각했지. 시호는 드라이브나 공원 산책까지다! 아, 다음 주면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게 되니, 사람 없는 평일에 아파트 수영장에서 시호랑 실컷 놀고 싶다. 그러고 보니 시호 수영복도 새로 사줘야 하네. 또 몰에 가야겠군. 


통행제한이 풀리면서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약속이 많아졌다는 거야! 통행제한이 풀리고서부터 매주 주말마다 집에 손님이 왔어. 이제 남녀가 함께 외출할 수 있으니 부부가 함께 남의 집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잖아. 내가 파나마에 이렇게 아는 사람이 많았나? 싶게 주말마다 손님들이 왔어.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는 집으로 손님을 초대하는 경우가 집들이를 제외하고는 드물잖아. 중남미의 문화는 가족중심이라 집으로 초대하는 일이 잦은 것 같아. 그래서 크리스마스나 길게 쉬는 부활절 연휴엔 다들 가족과 함께 하느라 식당이나 상점들도 모두 문을 닫아. 가족 없는 사람은 서럽겠더라고!! 


가족 얘기를 하니, 네가 꾸릴 너의 가족 스토리가 궁금해지는구나?!

강원도에서 살 집도 이미 정해졌고! 너와 남자 친구의 관계 형태도 바뀔 날이 머지않았네. 전세자금 대출 문제로 혼인신고를 2월에 할 예정이라고 했던가? 네가 가족을 꾸린다니! 기대가 된다. 배려하면서 잘 살 것 같기도 하고 남한테는 배려왕이면서 남자 친구한테는 각종 꼰대 짓을 일삼던 너의 과거 이력이 얼마쯤 걱정스럽기도 하네. ㅋㅋㅋㅋㅋㅋㅋㅋ 도연아.. 결혼생활이란 건 말이다... 라며 인생선배 인척 오지게 하고 싶은데 해줄 말이 없다 없어. ㅋㅋㅋㅋㅋ 그런 건 뭐 한 40년쯤 행복한 결혼생활하신 분들한테나 들으렴 ㅋㅋㅋㅋㅋ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거지 뭐~ 처음엔 서로 맞춰가는 단계라서 많이 싸운다고들 하는데, 내 생각에는 맞춰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게 좋은 것 같아.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상대방을 인정하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내가 말은 쉽게 했는데, 사실 우리 부부는 설거지를 네가 더 많이 했니, 내가 더 많이 했니.. 이런 쪼잔한 걸로 자주 빈정이 상해서 다퉈. 아니? 심지어 말 몇 마디에 삐져서 둘 다 입을 다물어버리니까 다툼까지 가지도 못해.

"설거지 요즘 계속 내가 했어!"

이 한마디면! 이틀 동안 말 안 하고 냉랭하게 지내기가 가능해. 우린 둘 다 에이형이니까. ㅋㅋㅋㅋㅋㅋㅋ

"무슨 소리야~ 나도 맨날 했는데!"

"뭐래~ 어제도 오늘도 내가 했는데!!!"

이렇게 대화가 흘러가. 근데 말이야, 사실 설거지는 하루에 한 번으로 끝나질 않잖아? 우린 아마 둘 다 매일 설거지를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얘기지. 서로 자기만 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이곳은 금요일 밤이야. 내일은 전에 말한 내 블로그를 구독하던 그 언니네 집에 초대를 받았어. (이봐! 역시 중남미는 초대를 많이 하지?ㅋㅋㅋㅋ) 그 언니랑 친한 다른 부부도 함께 보는 건데, 그 집은 남편이 파나마 사람이라서 아마도 내일은 오랜만에 스페인어를 잔뜩 써야 할 것 같아서 조금 긴장돼. 특히 나는 파나마 사람들이 하는 스페인어를 정말 못 알아듣거든! 과테말라에서 쓰는 스페인어는 또박또박 발음하는 반면 여기는 뭘 그렇게 웅얼웅얼거리면서 말하는지.. 말끝을 항상 흐리고 묵음 처리하며 발음하지 않는 건 또 왜 이렇게 많아~ 마치 90년대 랩 vs 요즘 랩 같은 느낌이랄까. 90년대 랩은 귀에 쏙쏙 잘 들어오는데, 요즘 랩은 가사를 찾아보지 않으면 알아듣지를 모르겠더라고. 아무튼 아주 오랜만에 마트 캐셔 직원 외에 다른 사람이랑 스페인어로 말을 섞을 것 같아! 즐거운 점심식사가 되길 기대하는데 어쩌면 듣기 평가 같은 시간이 될지도 모르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는 어떤 주말을 보냈을지, 그럼 답장으로 너의 소식 기다릴게!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파나마에서 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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