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연 Sep 25. 2020

강원도에서 일 년만 살아볼까?

연남동에서 파나마로

채리에게


역시나 이번에도 술냄새가 나는 편지 잘 받았어. 와인에 대해서 나도 한마디 곁들이자면 말이야. 네 말처럼 와인은 '먹고 죽자!'의 파이팅이 없는 술인 게 확실한 것 같아. 가끔 친구들과 홈파티를 하면 와인을 죽도록 마시기도 하지만 소주만큼 내 몸을 상하게 했다는 죄책감을 느끼게 하지 않거든. 어떤 의사가 그랬대. 소주는 향이 나는 화학약품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해하는 일에 쾌감을 느끼는데 담배, 술, 타투 같은 것들이 그런 류이지. 자신을 망가뜨리고 몸을 상하게 하면서 느끼는 쾌락 말이야. 여행이나 사랑 같은 쾌락들은 긍정적 쾌락인 반면에 소주는 부정적 쾌락이지만 그 또한 인간에게 필요한 요소가 아닌가 해. 그래서 나는 긍정적 쾌락을 위해서 오늘 와인을 마시러 간다... 하하...


강원도에 집을 보고 온 이야기를 해줄게. 한두 달 동안은 귀농귀촌 카페나 지방 자치단체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며 빈집이나 귀촌을 하는 신혼부부에게 주는 혜택 들을 알아봤어.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귀촌의 순서를 알게 되었는데, 


첫 번째로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먼저 정하기.

두 번째로 도시를 정했다면 마을을, 그리고 그 마을의 토박이나 이장님의 정보들을 통해 집을 구할 것.


네이버 지도를 확대해가며 내가 원하는 조건을 찾기 시작했어. 서울에서 2시간 내로 갈 수 있는 곳, 그리고 근처에 냇가나 산, 강가가 있는 곳, 1시간 거리로 바다에 닿을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지. 그러다 결정한 곳이 인제야. 강원도 인제. 인제에도 여러 면이 있는데 남면 북면 기린면... 3주 동안 인제를 돌며 발품을 팔기 시작했지.

첫 번째 주에는 부동산을 돌아다녔어. 어떤 곳은 문 앞에서 들어오란 말도 없이 "집 없다." 란 대답만 듣고 돌아서야 했고, 어떤 곳은 "싼 값으로 귀촌하려면 포천이나 전라도로 가라."는 대답을 들었지. 몇 군데 집을 돌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고 예산에도 맞지 않았어. 우린 시무룩해져서 다시 서울로 돌아왔어. 당장 이사할 것도 아니고 시세와 집의 컨디션 정도만 보려고 갔던 곳에선 서울에서 내려오려는 젊은 신혼부부에게 곁을 쉽사리 내어주지 않더라. 그래서 방법을 바꿔서 이번 주엔 부동산이 아닌 마을회관과 면사무소들을 찾아가 보기로 했어. 집이 없더라도 이사 갈 예정이 있는 집이 있는지 혹은 관리가 안되고 있는 빈집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어. 그러다 아주 작은 읍내에 있는 한 부동산에 들어갔는데, 머리가 백발인 (하지만 젊은) 아저씨가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우리 사연을 쭉 듣더니 또 같은 말을 하는 거야. 


"집 없어. 그리고 인제 여기가 비싸."


실망을 하려는 찰나 전화를 한통 하더라. 


"어이~ 집 내놓은 거 전세 주면 안 돼? 빚이 1억이랬지? 1억에 전세 줘 봐. 여기 젊은 사람들이 살아보고 좋으면 집 산대는데?"


그리고 전화를 끊으시더니 집을 보러 갈 거냐고 묻더라고. 우리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금액이었지만 그냥 구경이나 할 심산으로 알겠노라 했지. 부동산 아저씨의 차를 타고 소양강이 넓게 펼쳐진 길을 쭉 따라 올라가니 몇 가구가 모여있는 산기슭으로 들어갔어.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글쎄... 너무 좋은 거야. 집 앞으로는 작은 정자가 있고(여기서 술 마시면 꿀맛이겠다! 생각했어) 집 안으로 들어가면 거실에 큰 베란다로 소양강이 쫙 펼쳐진(거실 문을 열고 나가는 테라스에서 술을 마시면 죽이겠다 생각했지!)... 뭐 거의 궁궐 같은 집이었어. 집 뒤편으로는 아궁이가 있고, 옆으로는 텃밭이, 배나무 감나무 소나무가 심어진 앞마당은 또 어떻고... 관리가 안되어 잡초가 내 키만큼 자라 있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꼭 살고 싶어'라는 눈빛을 주고받았어.

부동산을 나와서 다른 동네로 향하는 길에 남자 친구가 그런 말을 해. "다른 데 보면 눈에 들어올까?" 나는 대답했지. "아니." 그 길로 유턴을 해서 다시 작은 읍내로 돌아와 밥을 먹으며 우리는 그 집에서 살기로 결정해버렸어. 


예상보다 너무 빨리 집이 결정되고 나니까 이제 현실적으로 돈을 마련해야 할 차례가 돌아왔어. 어제는 은행을 다녀왔고 추석엔 어른들께 인사를 드릴 참이야. 살 집을 결정해버리고 나니까 모든 일이 일사천리. 아직 부동산 계약을 하진 않아서 변수가 생길까 두렵기도 하지만,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기분이 너무 좋아.


그런데 말이지. 인제 남면 신남리의 이 작은 읍내로 들어가게 된 사연이 있어. 지난주에 실망을 하고서는 인제는 포기하고 다음주엔 다른 곳으로 가보자 그랬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남자 친구가 "우린 남는 게 시간인데 고속도로 말고 국도로 동네 구경이나 하면서 가보자." 그래서 국도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는 길에, 저기 멀리 너무 예쁜 마을이 보이더라고. 소양강 바로 앞에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걸 보면서 "저긴 어디지? 너무 예쁜데?" 하고는 네이버로 지도를 보고, 우리 다음 주에 저기 가볼까? 하면서 가게 된 곳이 바로 여기야. 빨리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고속도로를 탔더라면 가보지 않았을 곳인 거지. 마음의 여유를 갖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면 좋은 일이 생기는 것만 같아. 

부동산 아저씨가 한마디 하더라 "너희들, 날 만난 건 행운이야." 


행운과 행복은 역시나 곁에 널린 아름다움 들을 천천히, 즐기면서 살아야 찾아오는구나. 이 모든 우연들이 켜켜이 쌓여 우리들 인생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 편지에서 강원도에서 도연이가,라고 쓰는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 :) 아직 우리 집이 되지 않아서 사진을 첨부하진 못하지만 다음번엔 계약과 함께 사진을 보낼 수 있기를.



채리의 오늘 하루도 곁에 널려있는 아름다움 들을 천천히 즐기는 하루가 되길 바라. 

그럼 다음 편지에도 맛있는 음식과 좋은 사람들, 그리고 독한 술을 곁들인 하루를 전해주렴. 그럼 이만.



ps. 안 바쁠 때 답장 좀.

연남동에서 도연이가.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 참.. 이래도 지랄 저래도 지랄이구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