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에서 첫날밤

천천히 걸어도 돼, 몽골이니까!

by 도연

- 8시예요 ~ 모두 일어나세요~

한국에서 온 다섯 명의 게으른 캠퍼들을 잉케가 깨운다. 간밤에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 텐트가 무너질까 긴장하며 선잠을 잤더니 아침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친구들은 혹시 새벽에 일어났을 때 별이 쏟아지진 않을까 싶어 새벽에 텐트 밖으로 몇 번이나 나갔다 왔단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도 빨리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일단, 일어났으니 모닝커피를 마시자. 캠핑의 즐거움 하나, 투박한 코펠에 끓인 물을 핸드드립으로 내려마시는 일이다. 커피 한 잔을 내려마시면서 말한다.


벌써 9시야 잉케가 9시엔 출발해야 한다고 했는데...
천천히 가자. 괜찮아, 몽골이잖아!


그래 여긴 몽골이잖아. 재촉하는 이도, 기다리는 이도 없는 이곳은 몽골이야. 천천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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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이웃 강 야채님, (닉네임이 야채, 실명이 채리) 반가워요.! 여행 다니시는 거 참 부럽네요. 포스팅이 너무 재밌어요. 맛있는 거 많이 먹으러 다니시네요?., 술 좋아하시나 봐요!!! 어머나, 당신 제 스타일인데요?"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 내 과다! 인스타, 블로그에 멤버 모집글을 보고, 장비가 없는데 괜찮겠냐고 채리님이 댓글을 달았다. 개인 장비 다 빌려줄 테니 걱정 말고 함께 하자며 적극적으로 꼬드김을 한 결과, 야채님과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여행을 함께 한 다섯 명 중 누구 하나 제 역할을 안 한 사람이 없지만, 특히나 채리는 언니 누나의 역할도, 긍정적이고 밝은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도 해주어 참 고마웠다. 몽골 여행 이후로 채리와 친구가 되었고 그 새 상황이 많이 달라져, 그녀는 결혼을 하고, 파나마로 이민을 갔고, 잘생긴 아들의 엄마가 되었다. (뭐지, 왜 난 하나도 변한 게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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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선 한 달에 한 번 술을 팔지 않는 날이 있다. 그게 마침 오늘이네. 왜 하필... 몽골 사람들은 평소에도 술을 아주 많이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 하루라도 먹지 마' 하고 나라에서 정했다고.(믿거나 말거나) 북유럽 여행을 갔을 때도 6시 전에 술을 사야 해서 뛰어다녔던 게 떠올랐다. 5시 59분쯤에 주류 마트에 도착해 주인이 셔터를 닫으려고 하는 순간, "Plz!!!!!"를 외쳤다. 그러고 보면 한국처럼 자유롭게 술담배를 구입하고 새벽까지 취해서 놀 수 있는 나라가 잘 없다. 여행을 다녀보면서 느끼지만, 한국 참~ 살기 좋다. 물론 이 모든 걸 다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젊은이'기 때문이겠지만. 오늘은 수요일. 몽골에서 술을 살 수 없다. 술이 없는 밤을 보내게 될 거란 공포감이 엄습했다. 캠핑의 꽃은 별도 달도 아닌, 술... 술이라고! 오늘 술을 사는 데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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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를 들러 내일까지 먹을 식량을 사고, 오늘의 목적지인 욜링암으로 간다. 독수리과 새인 욜이 사는 요새라는 뜻의 욜링암은 일년 내내 녹지 않는 얼음으로 뒤덮힌 계곡이라 한다. 허허 벌판 뷰에서 욜링암이 가까워져오자 갑자기 웅장한 느낌으로 확 바뀐다. 몽골에서 길가다 혹은 마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던 "어워"도 욜링암에서 만났다. 산이나 물에 대한 돌무지로 되어있는 자연 신앙의 형태다. 유목민들이 유목생활에 날씨가 중요해서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몽골사람들만의 신앙이라고 한다. 돌무더기 위에 돌 여러 개를 던져 올리고 소원을 빈 후, 주변을 3바퀴를 돌면 된다. 잉케가 시키는 데로 돌 여러 개를 던지고, 돌무지를 빙빙 돌며 행복을 기도했다.

"주변에 있는 흔한 행복들을 알아차릴 수 있게 마음의 평화를 주세요. 그래서 언제나 행복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나는 보름달이 뜨거나, 생일날 초를 끄면서, 혹은 새해의 일출을 보는 것 같은 특별한 것들에게 소원을 빈다. 소원을 빌게 되는 어쩌면 흔하디 흔한, 또 어쩌면 특별 하디 특별한 날, 대상에게 소원을 비는 것의 유형은 별로 구체적이지 않다. 무엇을 이루어 달라고 한다거나 얼마를 갖고 싶다거나 시험에 붙고 싶다는 등의 어떤 사건과 결과에 대한 소원을 빌지 않는다. 언제나 소원은 같다. 행복하게 해 달라. 언제나 행복하게 해 달라. 행복을 위해서 마음이 편하도록 해달라. 몽골에서는 주변에 널려 있는 흔한 행복들을 내가 알아차릴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흔한 행복은 어쩌면 특별한 눈으로 마음으로만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언제나 평온해야 한다.

누가 물었다. 너는 왜 보름달이 뜰 때마다 소원을 비냐고.


나는 말과 마음의 힘을 믿어서 자꾸 말하고,
자꾸 생각하고, 자꾸 마음 다해 바라면 그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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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링암 트레킹을 마치고 오늘의 숙소인 게르로 왔다. 유목민 체험을 할 수 있는 게르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쾌적하고 좋은 환경에서 여행하길 바라는 이들은 불편하고 불쾌할 수 있다. 컵이나 접시는 꼭 깨져있고, (이게 과연 문화일까? 의구심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선 이 나간 컵으로 물마시지 말라고 하는데 말이지) 담요 먼지는 10년은 족히 묵은 것 같다. 다행인지, 첫날을 캠핑으로 노숙을 했기 때문에 10년 묵은 먼지로 뒤덮인 게르 마저 아늑하다. 참 다행이다.


오늘은 지평선 너머로부터 보름달이 떴다.

이 날 이 시간부터 나는 다시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몽골의 자연의 신이 내 소원을 들어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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