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arest one “that” makes you
the Loneliest.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외롭게 할 때.
나를.
마음의 나침반은
첫사랑을 향하고 있다.
언제나
그리고 어떤 종류의 "첫사랑"은
그 주체가 공교롭게도
상대적으로 순진하고
상대적으로 작은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경험치를 소유하는 바람에
이미 그 사랑의 첫 비극을 예고한다.
가장 순수했던 사랑은
그렇게
기쁨, 불안, 초조, 절망, 어두움, 질투 등으로
재분열 하면서 한 개채 역사의 시작을
알린다.
첫사랑은 착각을 동반하고
"첫 사람"을 만나면서 첫사랑의 오류를
치유하지만, 미숙한 사랑은 첫 사람을
끝내 보내게 되는 상황을 만든다.
그러다 보면 부득이하게 고독해야 하고,
고독을 통제하려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혼자"가
내 정체성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적당히 개인의 감정을
보호하는 선상에서
가까이해야 하는 타인의
알려고 할 뿐.
나도 너에게 그런 타인이었을 테지.
그러기에
이런 불특정 한 다수의
나에 대한 무지의 숲에서
나를 읽어주는 상대를 만나면 그는
나에게 잊지 못할 영원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면
나는 일단 세상을 잃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나면
그 이상 나를 나로 느끼게 하는 존재감을
갖기가 힘들다.
(당분간—2년 정도?—은)
대가를 알고 사랑한 게 아니고,
예정된 이별에 지장을 찍고 사랑을 했어도
의식이 불러내는 기억의 사람과 비교되는
”나를 모르고자 하는” 주변인을 잠시나마
멀리하지 않지 않을 순 없었다.
장-다비드 나지오
최초
경험의 증거가 내가 반복하고 있는
삶의 패턴 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첫사랑의
실패가 내 모든 사랑의 실패를 방조하는
나의 무의식 인지도 모르지만
나를 부정해서는 결코 이 그물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이를 딜레마라고 하면
나는 딜레마를 제대로 정의하고 있는 것인가.
모든 말들이 다 오류라고 해도
확실한 건
가장 가까운 사람이 때로 나를 가장 외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오류로 증명하는 날,
마침내 “집”이라는 곳이
내 영혼의 안식처가 되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
세상이 경이로워 보이게 하는
usual suspect 가 될 때
나는 옅은 미소를 띠고
어딘가 혹은 누군가를 바라보며
이 글을 썼다는 사실을 잊고 말 것이다.
이 전제의 본질적인 오류는
내가 날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데에 있음을
나는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