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UnSell-able Zone of Existence
오지 않는 잠이 밤에 찾아오면
악몽도 아닌 꿈을 꾸며
이를 죄책감이라 정의하기에는
누구 어느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에 거주하지 않는
내 상황이 멋쩍어진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죄책감은
내가 하지 않기로 혹은 하기로 했던 것들을
무시하고 지낸
부득이하게 느껴야 하는 감정이었을까.
다시 말해서
밤의 감정 쓰나미는
오후 내내 억눌렀던 의식들이
비로소 지켜보는 이가 없다며
몰래 파티를 여는 것만 같았다.
신나게도 나를 괴롭힌다.
피곤은 하기에 눈을 뜰 수 없고
약 올리는 의식들은
내 통제 선상에서 벗어나면서
오후의 나와 정 반대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중간한 아침인
오전 두 시의 하늘과 눈이 마주친다.
새벽 인사할 겨를 없이
고개를 돌려봐도
이미 시작된 오늘을 말릴 수도
이미 지나간 어제에게 남은 미련을
구걸할 수도 없이 버틴다.
그리고
밝아오는 빛이 눈꺼풀을 스치며
오늘의 나를 깨운다.
살아 있음에 직장이라는 의무가 붙어야
의미를 챙기는 이유는 사회 분위기 탓일까.
일어나서 카톡으로 "좋은 아침!"이라고
오늘 아침이 좋은지 보고해야 할 계정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카톡이 생긴 이래로 생긴 관습 때문일까.
어떻게라도 갈 곳이 있고,
어떻게라도 만나야 할 사람을 만들어야
오늘 내가 의미 있게 보낸 거라고?
"의미 있음" 이 허상이라도
좋은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하는 중에도
의식의 울타리 안에는 가족들, 친구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들의 무언가. 이니까
나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선언하는 중에도
나는 글을 쓰고, 영화를 보고, 요리를 하고, 장을 본다.
이처럼
Nothing 혹은 No one
달력에는 혼자 무언가를 한 내용에 대한
기록보다는 누구를 만났고,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가
보란 듯이 적혀 있다.
본능적이든, 사회학적이든, 생물학적이든
인간 사회에서 존재의 단가는
궁극적으로는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마지노 선에서 그 역사를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이미 혼자 태어나서 길러진 것이 아니니까
그 이전에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이라는 존재가 결코
타인이 부재하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특정한 전제 없이도
아무것도 아니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부터
감정적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나의 본질과 함께
이러한 깨달음의 출발선을
갓 통과하더라도
그때의 내 기분임
도 덤으로 깨달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