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mantic Eagle Jun 01. 2019

100 년 뒤에 나는 살아 있는가

“이제 좀 살 것 같다.”

달력을 넘기는데 2100 년

3000 년을 훌쩍 지나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24 시간 동안 넘겨도

멈추지 않을 것만 같다.


무심하게 넘어가는

숫자들이 내 시야를 관통하면서

22 세기로 넘어가자

 “나”에 대한 비이성적 집착에

사로잡혔다.


나에게도 “실제로” 끝이 오겠구나.

그런데도 회계연도는 멈추지 않겠구나.


비로소 작별의 순간은 오고

비로소 내가 관조한다고 여기는 세상은

그 고유한 주체가 사라지겠구나.


그럼에도 멈추지 않을

인류의 시계에 대한 감정을

질투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질투가 아닌 것도 아닌.


그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잠시 그 사실에서 떠나

지금 뭘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주 사소한 욕구가

아주 중대한 사실을 이기는 순간이었다.

혹은 잊어보고자 하는 욕구가 조장한

가짜 식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반드시 오지만

오늘내일이라는 커튼에 가려 보이지 않는,

혹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한 때 묘비명은

“이제 좀 살 것 같다”

였다.


죽음과 바통 터치를 하는 순간이

곧 절대적 자유,

완전한 삶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20 대 초반은 그렇게

죽음이라는 개념을

정복해보겠다는

발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논리로도

그때의 객기로 탄생한

내 묘비명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현실 세계의 제약과

의식 세계의 무제한의 영역

그 중심에 인간의 육체가 버티고 있다.


지금도 삶이지만

“그” 순간도 “삶”이 아니라는 법은 없다.


이러한 전개를 떠나서도

2119 년 즈음에 없을 가능성이 더 많은

이 글을 쓰는 “당사자”는


사라짐이 두렵기보다는

그래서 다시 보게 되는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주변인”들에게

비이성적인 애착이 생긴다.


연민도 아닌

사랑도 아닌

미움도 아닌




이렇게 영원할 것 같은

물리적 세계에서

당장 저녁 뭐 먹을지 고민하며

TV를 틀어놓고

각자의 말만 하고 듣지는 않으며

같은 음식을 먹고

아무렇지 않게 밤이 되면

졸려서 자고

또 일어나는.


이 장면을 구성하는

사람들도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오니


벌써 그립다.


그래서 더 무뚝뚝해진다.

애착을 무시하는 논리가 지배할 때에는

괜히 짜증 한 번 더 내고

뒤돌아서 두려워한다.

 

‘날 떠나지 마’



그렇게 비슷한 눈빛을 나누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살았던 적이 오히려 비현실적이게

여겨지는 방식으로

“체크아웃” 하겠지.


시간이 없다.

”지금 같을”시간이 없다.

”어제 같은” 시간도 없고.

“어제 같은” 그 사람도 없다.



“지금”밖에 없었구나.



그 “지금”을

“지금”으로 인식할 수 있을 때

“지금”하는

모든 “우리”들이

계속해서


그립다.


“미래는 지나간 현재”라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것 까지가

나의 현재이자 미래이며

나의 “멈춤”은 그들의

흔적 없는 사라짐일 때.


나는 나의 “멈춤”과는 상관없이

내가 기억하겠다는 “장면들”만은

살리고 싶은

내가 기억하겠다는 “당신들”만큼은

멈추게 하지 않고 싶은



비이성적인 감정에

사로잡힌다.



 To

Be

continued. . .




작가의 이전글 “유튜브 광고”와 타협할 수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