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금 더 궁금해 할게
내가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하는
감흥선이 생기는 시점이
내가 내 삶을 비로소 내가 살았다고 여긴
시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은 내가
처음으로 내가 태어나서 살던 곳을 떠난
그 시점이다.
아니면 나체로
수술대에 올라 마취하겠다는
간호사의 차가운 손을 잡던 그 순간이었던가.
아니,
처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정도로 나를 좋아한 시점이다.
아니,
내가 그 사람을 떠나고
매일 깨어있는 시간을
죽어있던 시간으로 재활용하던 그 3년인가.
아니,
처음으로 대자연 앞에서
나의 살아있음을 부정한
어느 해변을 바라보던 오후 두 시였던가.
아니면, 처음으로
돈까스 서빙을 하고 받은
만원짜리 115장이 내 손에 들어온 순간이었던가.
앞의 줄을 적는데 눈에 물이 차는 게,
내가 꽤 울도록 조건화되어있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심장이 커피때문에 이상하게 뛰어서
노트북이 놓인 테이블이
비이상적으로 흔들리는데도
그 테이블에는 버젓이 커피가 놓여있다.
21일 째 집에서만 있던
집 사람들이 오랜만에 집을 잠시 비웠다.
집사람들이라는
맥락은 내가 얼마나 그들에게
화가 났든, 얼마나 이 집구석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든,
24시간의 어느 시점에서는
좋게 좋게 마주 보고
싫지 않은 척,
좋아하지 않는 척,
신경쓰지 않는 척으로
무장해야 하는 신기한 구도를 형성했다.
나를 키워준 두 사람과 살 때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화가나서 방에 문을 닫고
얼마나 가슴을 치며 울었든,
배가 고프면 삐죽삐죽 나와서는
맛있는 거 해 놨다고 부르면
아무일도 없는 척 나와서는
먹고, 어제 보던 영화를 이어보고,
잠이 드는 레퍼토리를 이어간다.
그 레퍼토리가 식상해서
집을 나와
먼 곳까지 와서도,
집사람들과의 이
비이성적으로 애정하고
미워하는 애증의 구도는
그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관성을 가지고 있는 바람에
나는 이 두 사람과 살면서
한 사람은 엄마를 애증하듯 애증하고,
다른 한 사람은 아빠를 애증하듯이 애증했다.
어쩌면, 나는
10 여 년을 내 존재를 부정하며
달라질 수 있음을 기대하고 돌아다녔지만
내가 있던 곳을 단 한 순간도 벗어난 적 없듯이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인간으로서
여기 저기를 다녔다고 해도
나는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두 사람의 존재를
벗어난 적도 그럴 수 있었던 적도 없는 방식으로
그 두 사람의 대체 존재를 찾아다녔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깨닫는 것은
내가 그 두 사람이었다는 것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인생의 지도를 그렸든,
다른 힘의 작용에 의해 그 존재적 긴장 구도를 형성하지 못하면
나는 다시 고향버스 19 번에 몸을 태우고
가슴을 태우며
두 번 째 고향에 두고 온
사람을 가슴에 묻고 사는
레퍼토리를 재생하는 것으로
혼자 비극의 서사시를 써내려가는 방식으로
하소연 할 곳 없는 먼 산만 바라보며
숨이 다 할 때까지
잊어야 할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 몸부림 치겠지.
방에서 울 것인가,
나가는 그 사람을 잡고
어디에 가냐고 의뭉스럽게 물어나 볼까 하다가
문을 열고 나가면서
상하는 자존심을 부여잡고,
또 그 여자에게 가는 그 향수를
강제로 맡으며
잡을 수 없는 그를 벌써 그리워한다.
대체 왜 좋아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하겠다.
대체 왜 이렇게 아파야하는지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누가 있어야 할 의무가 없는
텅 빈 세상을 안고
도착한 낯선 익숙한 곳에서
너와의 기억을 채우느라
정신없이 좋았던 만큼
매일 밤을 이별을 연습하느라 울었는데,
막상
가야하는 항구에서
배를 타느니 바다를 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극단적인 시나리오를 쓰는 방식으로
너를 만나
고 부터로 글을 시작하려는 나는
첫 번째 페이지부터 헤어졌다고 써야하는데,
도로의 표지판이
이 곳을 어디로 적었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다.
그 사람이 여기 있는데.
어디를 가라는거지.
그런데
짝,
ㅅ ㅏ. 랑 은
심지어 그 사람에게마저도
짐이 될 수 없음을 이해해야하는 방식으로
또 엄마.라는 존재.에.게.
가. ㅅ ㅓ 는
어쩌면 어떤 글은 마무리 할 의무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멈추지 않는 눈물로
결론을 대신하는 방식으로
조금 뒤에 돌아오는 집사람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웃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