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이는 못 산다고.
라는 생각이 지난 다음 시각에는
뭘 먹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시선이 노을에 빼앗기면
노을이 나를 바라보게 잠시 너를 잊어보았다가,
노을이 진 순간, 슬픔의
향기가 옆 사람이 피는 담배 향기의
힘을 빌려서
내 코 앞에서 서성이면
아마 나는 너를 생각하고 있다고
단정하기도 전에
눈물이 뚝 뚝 떨어진다.
그립다는 것이
이제는 거짓말에 가까워지는
30일이 지난 지금,
그래도 떨어지는 눈물의
이유가 니가 아니라면
나는 왜 우냐고
묻는 사람들한테
노래가 슬프다고 둘러대고는 한다.
울 때마다 일그러지는
인상이 못생겨진다.
그러다 보면, 잠시
인스타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응시하고 있는 창 밖의 어느
구름을 보며
메여오는 목이
목이 아파서라고 하기에는
약을 한참 먹었어도
그 구역의 근육은 나을 생각을 안한다.
이 여유가 나를 그리움의 밭으로
밀어넣는 게 아닌 것이 아닌 방식으로
아직까지는 너랑만 있는 공간에서
네가 잘 자라는 말에 눈을 감고,
너를 깨우려고 하는 문자에
떨리는 심장을 놓고 싶지 않은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의 밀도에서 너의 향기가 사라지고 있다.
겁나.
이런 감정이 존재의 우위를 차지하면
참,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꽤
서툴러보이고, 꽤 혼자만의 세상에 갇힌
아기로 보이는 방식으로
너를 잊은 세상을 아무렇지 않게 살
여력이 없는 지금,
나는 그냥 혼자 힘듦의 바다에서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없을 정도의
짠물을 흘리며,
아직도 네가 나를 사랑하기를 바라지만,
"바람"은 내 머릿속에서나 존재했다.
뻔한 기록을 남기며
뻔한 잠을 자고
뻔한 밥을 먹고
뻔한 대화를 나누겠다는데
그 상대가 "너"가 아닌 것에
결벽증을 느끼는 방식으로
현재 주위로부터 소외되는 나를
말릴 길이 없었다.
기어나와야하는 동굴에서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이는
10년 동안 해외 생활을 하고 돌아온 것과
무관하게 꽤
아직도 유아의 냄새가 난다.
베이비...
아기가 왜 우는지 알 것 같다.
세상에게 나를 이해시킬 만 한 단어를
찾지 못해,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
행복을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불행을 설명하기도 글렀다.
헷갈려서 쓰기도 힘든 글을
힘을 내어서 써 보는 방식으로
오늘까지만.
아프자. 라고 딱 말해놓고는
내일되면 또 나는 아플 것이다.
의식을 말릴 재간이 없다.
의식적으로 자꾸 나와야하는 방법만이
나를 살게 할 것 같은 방식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펴게 될 날을
맞이할 웃는 얼굴을 짓기 시작해야겠다.
이 글이 나를 자꾸 이 기억의 연못에 머물게 한다면
글을 잠시 떠나야겠다.
그리고 내일이 되면,
또 글을 쓰겠지.
이것과 같은 맥락으로
나는 네가 보고싶은데.
볼 수가 없다.
보는 게 문제라면, 사진을 보면 되는데,
사진으로 안되겠는 것을 보면,
사진으로 속이기에는
너무 영악해진 방식으로
이제는 "보고싶다"는 말도
거짓말로 들린다.
피부과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
얼른 들어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