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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tic Eagle Nov 03. 2020

There's no Reality

현실은 없다.

한국, 뉴질랜드, 미국,

골드코스트, 런던, 시드니,

덴마크, 한국..


분명 떠나고 싶었는데,

떠나서 그 생활을 유지하는 힘을

가져보려고 노력한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떠난 곳마다의 추억은

기억이 허락하는 용량 안에서

잊을 만 하지만, 그리하여 부서진

심장과 깨졌다 붙였다를 반복한

"현실"이라는 개념이 오히려

적응하지 못하는 지금의 나를

카오스 속에서 살게 하는 것만 같은.



술이 취하게 하는 세상에 꽤 흥미가 있었고,

카페의 인테리어들이 조장하는 분위기에

취할 순진한 구석이 있었기에 꽤

소소하게 soso 하게 즐거울 수 있었던

프레임의 안정도를 secure 하는 마음속

무형의 존재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렇게, 깨진 현실도 6개월 정도의 불면증을

견디고, 취할 때까지 마시다 응급실 바닥에서

눈을 뜨고, 울다 울다 머리가 깨지기 직전

반성을 하고 좋게 좋게 살기로 결정하고,

맛있었던 것들이 있었던, 그리하여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여길 수 있던

순진한 구석이 사라진 개체가 멀쩡하게 살기

버거운 "현실"이란 존재했다.



결국 그 현실이라는 것도 타인의 안정된 현실들에

얹혀서 잠깐잠깐 행복한 듯 보였지만,

내 명의의 문서 하나도 없고, 내 명의의 통장에

다달이 꽂히는 일련의 숫자의 조합이 없는

서른 하나가 당당한 눈빛으로 서 있을 곳은

초록불이 켜진 횡단보도뿐이었다.


의도한 것이 아니었지만,

여러 현실의 문이 열리고 닫힌

그 트라우마의 마지막 종착역에서 나는

내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과 만난다.



그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집,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의 향기,

그 사람의 말투, 목소리, 눈빛,

그리고 나의 방황하고 발산하던 의식의

여정이 그의 심장이 정착을 했다.



그러나 습관이 무섭듯,

무언가를 떠나 버릇하고,

정착을 두려워하는 본질적인

성질이 그를 떠나게 한 날.



나는 나에게 절대적인 트라우마를 남긴다.


숨 쉬는 매 순간 죽어야지 하다가

그럼 안 되지를 반복 하다 보면

어느새 머리가 다 빠져있었다.



얼굴은 늘어지고 뇌는 쪼그라들어

거울을 보는 시간이 줄고,

잠을 자는 시간이 늘어났지만,

잠은 한 숨도 못 잤다.



엄마에게 하소연하고

친구에게 하소연해봐도

그들은 갖지 못한 내가 가진 세상을

애써 이해해 줄 이유 따위는 없다.



그들은 그들의 현실의 안정도에 따라

"열심"히 살고 있었다.


하루 연락 안 해 보면,

알 줄 알았다..

그리고 연락이 올 줄 알았다.



끝난 거 아는데,

우리 사이 졸업장을 찢고

다시 입학시켜 달라고 졸라 보지만

그 연극에 상대해주기에는

사람들은 일 하기 싫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일을 하러 갔다.

일을 해야 하기에

나를 쉽게 지나칠 수 있었다.



현실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현실이 있다고 해도 내가 잡을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이 희미해지고

현재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차를 피해 걸어 다니기 위한

것일 뿐인 것만 같은.



무너진 억장을 한국어 몇 자와 문법과 몇 개의 문단으로

붙여본다지만, 이 글을 떠나서 허공을 바라보는

이 개체는 언제나 엄마 잃은 고양이처럼 불안하다.



내가 더 아픈 쪽이라서 다행이지만,

나도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지만,

허우적거리다 빠져서 어느 정도 수심으로

내려온 내 마음이 떠올라서 숨을 쉬어야 하는 게

정답일 수도 있는 것과는 별개로

굳이 힘들여 올라가서 산소를 마신 세상 앞이

여전히 그 사람을 볼 수 없고,

아니, 그 사람과의 이야기가 끝난 세상이라면

이왕 물에 빠진 거, 그냥 이 속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듦에도

어김없이 건져 올려지는 장소는

엄마 아빠의 현실,

친구의 현실이었다.



그들의 현실 네트워크는

내가 있다는 전제 하에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허상에 가깝지만.



그냥 살고 싶은 인간이

사람 하나 없이 살아야 한다고

죽은 척 연기를 하려는 것 같은데,

그래도 지가 마시는 산소랑 커피 값을 하려면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할 걸 잘 아는 사람이,



그리운 사람 하나 못 놓고,

매일매일 병들어가는 게.



현실은 깨닫기 전에 지나갔다.

봐서 벅찬 장면도 지나가야 하고

봐서 짜증 나는 장면도 어느 순간이면

지나가 있었다.



더 사랑하고 싶은 사람도 더 사랑할 수 없고,

덜 사랑하고 싶어도 어느 정도의 인류애가

나로 하여금 동정을 일으키곤 한다.



난 못 헤어 나올 예정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내가 여기에 왔으니 이런 글을 쓰고

이런 현실을 내 현실이라 인정하고

숨 쉬는 것이다.


그곳에 있었으면, 그곳에서의

현실을 운운하며 지냈으렷다.



이 글도 끝낼 수가 없다.

나는 글이 완성되어 발행되는 순간

이 지나면

또 폰을 보며 그에게 연락을 해도 되는 건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폰만 보면서 말 뿐인 연락을 하는 사람들이

제일 한심하다며 핀잔을 주던데,

지금 내가 누구의 핀잔에 흔들려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으면

3개월 전에 차렸겠지.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로 많이

좋아한 존재가 빠진 상태는

내 영혼이 다 빠져나갔는데도

그 산물이 있지가 않고

없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기에

다시 이 개인이 "자기" 감을 찾으려면

100일 보다는 많은 시간이 필요로 하다는 것을

모르겠지. 내가 아니니까.



내가 누구를 연기하려고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을 자꾸 만들어내어

나를 불쌍하게 만드는지

그 시초를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내 눈에는 엄마가 들어오고 있다.



내가 더 사랑했고,

운 좋게도 그는 나를 덜 사랑할 수 있었고,

운 나쁘게도 마지막으로 사랑한 존재의

정중한 거절은

창원 하늘의 공활한 가을 하늘과

장렬하게 전사하는 붉은 낙엽을

감상할 겨를 도 없이

비가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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