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로 풀어서 이야기를 만들어
옆 사람 붙잡고 그 소리를 하지만
않았어도, 그 사람은 나를
어떠한 사람 취급을 하지 않을 테지만,
그걸 감수하고도 해야 할 말이 있을 때는,
그것이 하소연일 때에는
하소연의 근거지와의 적절한 대화가
불가능했다는 증거이고,
그렇게 본질과의 차집합은 늘어가는 방식으로
내가 하는 스토리는 그 회가 거듭할수록
반-창의적으로 변질될 뿐이다.
집단적으로 인지 가능한 의식의 영역은
그 지역사회와 관습의 합작으로
긴밀하게 사회의 rule과 교통정리가
끝난 채, 유튜브의 활성화로 지능적으로 현명해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아진
사회에 살고는 있는 듯 보이지만,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흘러가는 사회의 시간과
뿌리는 잊고 전 세계로 활발하게 교류하는 개인의 시간은
그 역학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밤에는 잠이 들고 아침에는 잠이 깬다.
일어난 사건은 일어나지 않은 사건의
가능성을 내포한 계중 유일하게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결과의 행방과 무관하게
일어나기 전에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자유"의 존재보다는 "필연"의 관성이
더 강해 보이는 금요일.
오늘이 금요일임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이미 "금요일"이라고 가리키는
폰의 시계를 보면서,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것과
싸울 필요가 있나 싶은 방식으로
네가 나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는데,
나는 그 단순한 "팩트"와 싸우겠다니,
2020년 11월 13일의 금요일이
나를 비웃고 있다.
어떤 사람을 다시 보는 사건에 대한 가능성보다
더 이상 "매일" 볼 수 없다는 그 "사건"은
두 개체에게 영원의 자유와,
불멸의 속박에 대한 관성을 미지수로 부여한 채
원한다면 불안하게도 그 일말의 "가능성"을 믿어보라고
하하 거리며,
보란 듯이 오지 않는 답장 앞에 무릎을 꿇어
울게 만드는 이 모든 것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아니면 내가 태어나기 이미 전에,
내가 서른넷이 되는 해의 11월 13일의 금요일에
너는 그리하여 잊어야 하는 사람을 못 잊어
그렇게 울 것이 계획된 것이었는지,
이렇게 글을 전개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써내려 갈 수 있다는 필연만이,
우연을 운명같이 보이게 하는 순간에도,
나는 말장난의 제물이 되기 싫어
로그 아웃을 하더라도
온라인에서 한 로그아웃이나
오프라인에서 한 로그아웃이나
당신이 없음을 신기하게 여기며
한바탕 울고 나면 저녁이 되어 있다.
얼마나 깊은 우수에 젖은 눈을 하고
얼마나 독한 도수의 술을
한 번에 목으로 털어 넣었다고 자부하든
얼마나 진한 커피를 샷으로 들이켰다고
우쭐해하며 살벌하게 떨리는 손을 잡고 있든,
현실과 일치된 선상에 있지 않는
잊을만한 모든 것은 단순하게
연락처를 알고 있다는 것 이하로
아주 소용이 없는 자기장의 영역에
존재해야 함을 알 때,
적당한 카페인에
적당한 술에
적당하게 오늘을 넘기는
맛에 산다고 하지만,
살아야 한다면
이렇게 살 수 없음과
존재 계약서를 놓고
타협 중이었다.
보고 싶다는 말을 온 세상이 다 듣고 있는데
너만 듣지 않고 있다.
보고 싶다고 하는 말을 할 면목이 없이
너를 떠난 내가 단순히 이제 창의적으로
돌려 어떻게 지내냐고 할 variation도
바닥이 나고 있는,
그리하여 나의 연락에
그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그만 연락해야 하는데,
그 타이밍을 못 잡고 있다.
정말 네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본 적이 없기에.
너를 만난 이후로.
그리하여 내가 너를 놔줘야
우리 둘이 행복하다면,
그리하여 그 미래의 조건 절을 믿고
너를 놓기에
아직은 불안하고, 아직은
네가 네 손으로 문장을 만들어
나에게 보내는 그 일련의
행위가 나에게는 필요한 지금이
꽤 불쌍한 방식으로,
나는 romanticism과 적나라하게 멀어지는
나의 소설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