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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tic Eagle Nov 13. 2020

존재의 해리

태어난 이후로

엄마 아빠의 존재적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하여, 그들이 터전을 마련한

환경에서 살면서 정립된

"정체성"이라 부르는 것의

주체인지 객체인지 구분하기 위해



나는 내가 아니기 위해

노력을 하기 시작한 것 같다.



한국어 대신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이래로, 나는 타국에 나갈 명분이

있는 줄 안 채, 10여 년을 한국과 외국을

왔다 갔다 하며 지냈던 것 같은데,



어느 시기가 지난 어느 날, 깨어보니

나는 10년 전 한국을 떠나기 전 상태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 곁에 있는 건, 그때 있던 친한 친구

한 명,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 그리고

몇몇의 친척들.



얼마나 오래, 먼 곳에 있었던 "적"

과 무관하게 나는 무궁한 이 땅의

어느 장소에서 혼자 뚝뚝 흘리는 눈물을

이제는 참기도 전에 흘러내리기에

우는 내가 익숙해진 타인들은

정확하게 나를 보지 않고도 나를

피할 수 있는 장소에서 "생각 없이

돌아다닐 때부터 알아봤다."라는

험담을 하기 시작하든 말든,

나는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기에

흐르는 눈물을 숨길 이유도,

비참하게도 그들이 필요한 마음을

숨길 이유도 없을 뿐이다.



뻔뻔해졌다.



불안하고 닻 없는 배가

찾아 헤매는 존재는

바로 적당히 알던 "타인"의

없지 않음이었다.



항상 애정 하는 사람이랑 붙어있다가

24시간의 중력이 완전히 증발하고

관성이 길을 잃었다.



부여잡을 존재라고는

그리하여 내 일말의 맨 정신을

잡을 군번은 바로 옆 사람들이었다.



비겁하게 보일지라도

나는 그들의 답장과 그들의

받지 않는 전화와, 그들이

가끔씩 아주 가끔씩 던지는

의미 없는 답장이 필요로 했다.



존재의 해리.



나는 누구의 무엇으로 존재하는 건가.

애정 하는 상대와 대상이 전이되어야 하는데

멀리 잇는 그에게 너무 많은 에너지를

보내는 만큼, 오지 않는 답으로 처절하게

정처 없는 자아를 정규편성 프로그램을 보는 것으로,

혹은 규칙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으로

보완해보려고 해도,



사람이 빠진 사람이 유용할 수 있는 온전한

정신은 많지 않다는 것만 깨닫는 오늘은

부모님도 어디에 가시고, 동생도 어디에 가서

텅 빈 집 안에서 정박할 수 없는 정처 없는

존재감을 부여잡고, 리모컨을 부여잡고,

울리지 않는 폰을 부여잡고 나는 "나"라는

자기 감을 잃지 않은 척 꽤 노력하고 있다.



내가 세상에 빚진 것도,

세상이 나에게 빚진 것도 없고,

탓할 상대도 없고,

감정을 전이할 존재도 없는

13일의 금요일은



내가 울면서 부여잡고 괴롭힐 타인도,

문자를 몇 개씩 보내서도 오지 않는 대답을

들을 상대도 없고,

그러기에 더 추운 듯 보내야 하는

공간 속의 공간을 차지한

내 존재의 전부가 해리되고도

만져지는 내 몸과 세상의 경계선에서



나는 내가 선택한 그 따뜻한

특정 타인이 만져서 알던

나와 세상의 경계에서

그의 눈 속에서 나를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었던 그 시공간을 뼈저리게

그리워하며



이제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나의 경계를 알 수 없는 그

의식의 불필요한 자유 속에서

오른손으로 만져보는 나의 왼 손이

차고 시린 방식으로

겨울이 왔음을 알 뿐이다.



이 차디찬 겨울 속,

당신은 얼마나 따뜻하게 보내는지

묻기도 전에

예전에 물은 질문은

아직까지 읽음 확인이 되지 않았음에



추위가 나를 그냥 삼킨.



당신들의 일반적인 금요일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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