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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tic Eagle Nov 14. 2020

고통은 어제에게 외주 하고,
좀 행복하란 말이야

 

애초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눈을 떠서 보이는 집 사람들의

존재에 새삼스러움을 느낀다. 



나의 얼마나 죽을 것 같은 심정과

무관하게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그들의 세상에 잠시 당황스럽다가



잠을 더 자야 할지,

밖을 나가야 할지 고민하기도 전에

그 날 정말 답답하면

밖을 나갔고,

참을만하면 집사람들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아침 메뉴가

무엇이었는지 훑어보곤 한다. 



집사람들이 집에 있다고 

그들의 방해를 받는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들이 없다고 해서

내가 더 열심히 사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오랜만의 자유에

자유를 만끽하기 바쁠 뿐이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문구에

그래도만 빠지면

살아야 한다는 평서문일 뿐이다.

쓸데없이 붙이는 그래서

드라마틱하게 살아보려는 

부사의 향연이

때때로 멀쩡한 존재의 평화를

막 부서뜨려도

저기 저 카페는 8시에 문을 열어서

10시에 문을 닫았다. 



인지되는 자극의 프레임을

1초 단위로 인지하려 할수록

이 물질로 존재하는 몸을 가진

내 영혼은 기억이 재생하는 "그때"

를 선명한 화질로 인지하는 만큼

단 1초도 일그러뜨린 얼굴을 하지

않고 살 수 없었다. 



나 이외의 사람들, 특히

가정을 이루고, 아이 손을 잡고

바쁘게 카페를 빠져나가는

"엄마, 엄마" 거리는 아이,

엄마가 된 친구,



내가 없다고 생각할수록

타인의 "있어 보이는" "현실"

에 비이성적으로 애착을 형성하고 있었다. 



내가 선택하여 싱글로 

솔로로 그렇게 10대의 

어느 날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가진 꿈이 이루어졌음에도



어떤 이의 "현재"와 "현실"

이 너무 많은 시간과, 너무 깨어 있는

의식으로 힘들 때는,

타인의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세상"에 그냥 영원한 방문자로

매일 나의 불안을 외주 하고 싶다. 



나는 "사실"을 서술한 것 같지만

어느 정도의 사실일 뿐, 

내가 1차원 적으로 인지해서

2차원으로 보이게 해서

3차원의 상상으로 가이드 한

어떠한 장면도 내가 상상해서 만든

작품의 그것과 같지 않을 방식으로

타인에게 그 희미한 실루엣만

전달되는 방식으로 

나는 내가 서술하는 형체의 덫에

갇히는 일반적인 의식을 가진,

아주 편파적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2020년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반적인 개체에 불과하다. 



1시간을 통화하던 그가

내가 5번을 통화가 되냐고 물으면

이제는 7분 정도 짧은 통화만

가능한 상황에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

삶의 브리핑을 하고 나서는

전화를 끊어버린다. 



이런 대접을 받고도

그 사람한테 아직도 연락하냐고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이런 대접"의 개념이든,

"저런 대접"의 개념이든,

이 연락이 결과적으로 

"시간 낭비"로 결재당하든,



오늘을 안 살 수도 없고,

그를 안 만났을 수도 없고,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었던,

그리하여 결과가 제3 자의 눈에

얼마나 선명하게 보이든, 말든,



내가 못 나오고 있는 "현실"을 

잃을까 봐 걱정하는 것도

지치고, 얻을 것도 없는 "지금"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스트레스로

몸이 상하든,



끊고 살 옵션을 손에 쥐고 있어도

놓지 않을 수 있는 것도

다 경험의 한 자락이자, 

내 인생의 구성물질이라는 것이라고

정의를 해야 합리적으로

내 공허한 슬픔과, 아쉬움과

"그런 대접"을 받고도

그의 세상에서 아직은 출구를 찾고 싶지

않은 내 존재 방식을

관조하며

어제 방문한 커피숍의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했다. 



사람 관계도 

카드를 내밀어

감정과 기억과 시간을

교환할 수 있으면

재미는 있겠다. 



사실 더 상처 받고 싶지 않은 

, 그럴 권리도 여유도 없는 

인간으로서, 가장 인간답지 않게

살 수 있는 방식이

가장 인간답게 살면서

편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고통은 이미 경험한 

"어제"에게 외주 하는 방식으로

현세의 인간에게는

"행복"같은 것만 이미

선조님들이 선물한 것이 분명한데,

이놈의 호기심은, 

멋진 세상을 물려줘도 

파괴해서 자기가 무슨 영웅이라고

처음부터 시작하려고 하는 것인지.



그리하여 나는 인간의 호기심을

존경하는 방식으로,

내가 걸어 들어간 미련한 방에서

나오는 탈출구를 찾느라

헤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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