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들이 다 빠져나가고,
그리하여 엮인 기분이 다
산화되어, 바라보는 공터에도
산발적으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마스크를 쓰지 않았던 시절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차피 신원 확인이 안 되는
타인들이 그래도 나를 피하지 않는 게,
송구스러울 정도로 자존감이
낮아지면,
그렇게 따지면 자존감이 왜
위치를 표현하는 단어로 구분되어야
하는지 따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높든, 낮든, 자존.
나는 존재한다.
그 감을 결정하는 게
왜 멀쩡한 그 주체여야 하는지
왜 생각의 흐름은 꼭
저런 식으로 자기를 낮추는 데에서
중력을 찾는지, 이런 식으로
조건화되어서 얻은 이익이 없어도
꼭 이렇게 운을 떼는 사람이 있더라..,
그렇게 말을 해야 자존감을
찾은 듯, 꽤 만족스러워 보이는
저 여인을 어쩌면 좋을꼬.
싶다고 말을 하는 것도
나라면, 그 둘 다 맘에 안 들면,
그래서 혼잣말로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존재시켜야 하는 게 더 어렵다.
좀이 쑤신다.
내가 나를 나라고 하는 것의
정의가 꼭 저렇게 그래 왔던 방식으로
떼는 운이어야 한다면,
결국 주체의 원천을 찾아가다 보면
1900년대 할머니의 어머니 세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찔한 family tree를 내려와
거울 속에 멀뚱멀뚱 자기를 쳐다보는
저 여인은 누구의 누구쯤인 것일까.
그리하여 나는 현재, 이 34로 나이가
바뀌어가고 있는 여인이 집중해야 할 건
현재의 안녕이라는 것을 안다.
누구의 누구여야 함에 대한 권리도 의무도
없이 나의 어떤 부분은 그냥 지금
내 일이나 열심히 하는 것에 그 소용을
다 했다.
지금 와서 12년 전 누구한테
말썽을 부린 사건을 떠올리며
미안해하는 것의 소용이
어디에도 미치지 않음을 알 때,
그리하여 잊을만한 것은
잘 잊은 것으로 치부하고
그럴 수 없는 것을 미련의
상자에 넣어 자주 아주 꺼내보는
것의 심리는 현재의 만족스럽지
않음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만족스럽지 않다고 정의하는
주체는 누구여야 하는지
꽤
미스터리 한 방식으로
"현재"를 엮고 있는
혹은 지탱하고 있는
것의 구성물은
꽤 많은 부분의 "과거"로
치부되는 기억의 네트워크이자
그 단서로 과거를 계획하는
"현재"를 구성하는 의식의
주체는 꽤 "나"인 방식으로
그와 엮인 여러 사람의 페르소나의
합이자, 그 또한
내가 내 멋대로 해석한 모양을 하고
있으니, 내가 어디까지 아는지
확인하기가 불가능 한
가장 가까운 타인들은,
그리하여 자주 만나는 방식으로
그들을 알고 싶은 것인지
그들의 눈 안에서나
존재하는 것만 같은
내가 그리워서인지
구분할 겨를도 없이
실시간 카톡이 넘나 든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사람" 혹은 "지위" 혹은
사회적 "위치" 간의 네트워크에서
단 한순간도 벗어난 적 없이
고독을 환상했지만,
고독 속에 있을 때만큼은
적당히 모르는 타인들로
둘러싸여 있고 싶어 했다.
어느 장소에서 집에 가려고 해도
대체 몇 명의 사람들을 거쳐야
그 영원히 고독할 수 있는
방에 갇힐 수 있는 것인지,
그러나 그렇게 아무도 찾지 않을 때만큼
갇혀 있는 방이 반갑지 않다.
가장 아이러니 한 건,
그럴 때 내가 찾는 건,
영상 속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사람들의 모양이며,
그들의 눈빛이고,
결국 직접적 소통이 불가능 한
안전망에서 혼자 재생하고 멈추는
시나리오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냥 네가 보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 하고 있는 거야.
이런 글을 써서
일일이 사람들과 나의
불완전하고 완전한
불가피한 none of your business
의 zone의 지도를 만들어서
내가 혼자여야 하는 이유를
합리화하지 않아도
그냥 어디에도 네가 있었던
그때가 그립다는 말이야.
유튜브 없이 네 얼굴을 보며
잠들 수 있던 때가 그립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친구를 만났다.
돌아가서 만날 남편과
아이가 있는 그녀와 몇 시간 동안의
대화를 한 것과 무관하게
나는 다시 nonebody로
돌아가기 싫어서
카페에 들렀다.
이 곳에도 나의 어떤 것도
없이 nonebody의 zone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고
글을 쓰다
집에 가서
유튜브를 자장가로 틀어놓고
자겠지.
이게 내 일상이다.
현실이자, 현재이자
오늘이다.
이게 내가 오늘에
충실하는 방식으로
완전히 피하는 방식이다.
...
그냥 니가 그립다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