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고자 하면
누군가의 간섭이
생긴다.
뭔가 같이 하고자 하면
반드시 공석이
생겼다.
제로섬은
지구의 균형을 사랑하는
그 감과
다르지 않는 방식으로
나를 여기서 더 외롭게
할 수도, 덜 외롭게 하지도
않았다.
함께하고 싶지 않지만
이미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이
적잖이 당황스럽고
함께하고 싶지만
그 옆 자리만큼은
공석이 아닌
모든 비지 않은 자리가
가슴 한 켠을
켠켠하게 한다.
그물같이 걸려있는 바람에
땅에서 발을 뗄 수 없게
살아야 하는 바람에
의식의 자유와
발 맞출 수 없음과
타협해야 하는 시점에서는
잠으로의 도피가 가장
바람직했다.
잡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거리는 멀어서
잔뜩 손을
내밀었지만
닿을 수 있는 대상은
차디 찬 벽 뿐이다.
이런 서술이
얼마나 진실이든
나는 특정한
닻과 매우 멀어지는
중이었다.
가서 붙잡고
다시 나를 사랑해 달라고
하고싶은데,
이미 지나간 시간들은
나를 비웃고,
이미 어긋난 공간은
보란듯이
나를 “환경결정” 하였다.
무엇이 죽음보다
더 나은지
모르겠는 방식으로
나는 무엇을 먹을지
생각 중이었다.
저 커플들은
나에게 보란듯이
애정 행각을 하는 게
아니었음에도
내 쪽에서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말의 따뜻함을 향한
기웃거림은
단지 겨울이
다가와서이기 바랄 뿐이다.
영하3 도 보다
그의 답변이 더 차갑다.
나의
체온으로 데워보려 해도
나에게도 그를 향한
온도가 남아있지
않을 뿐이다.
이 삶이
어찌
죽음보다 나은 것이냐고
묻고 싶은데
대화 상대가 없는 바람에
감정이 더 격해지지 않은 채
주의는 다른 곳으로 기울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은데
아무도 잡지 않아서
나는 도망갈 수 없이
그냥 가는 중이었다.
죽고 싶은데
삶이 나를 잡지 않고 있기에
죽고 싶은 마음이
상쇄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 나를
살리는 건
살아있는 생명체가
오늘도 살고자 하는
순수한 생존 본능이었다.
이 본능에
인간 사회의
파워 게임,
마인드 게임,
프라이드 게임,
유치한 게임이
들어서면
죽고 싶고
하기 싫고 답답하고
마스크를 눈으로
올려 쓰고 싶다.
뭐라고 누구에게
짖어대도
나는 버스가 있어야
저렴하게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오지 않을 것 같은 잠이 오듯
오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는 죽음도 오겠지.
태어날 생각이 없는데 태어났듯이.
내 인생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사회의 규제가 많고
니 인생이라 하기에는
어느 누구의 “니” 속에도
나의 희로애락이 들어갈 틈이 없이
2020년이
12 월로 들어섰다.
잘 지내냐고 묻고 싶던
대상은
(알 수 없음) 으로 대체되었지만,
가장 알 수 없는 건
가장 가까이 있는
오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인
방식으로
그들 또한
마스크를 써야 하는
보편성에 적용되는
나와 동일한 개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