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
이라는 단어가
진부하게도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고귀한
인간 감정의 관성을
진저리 나게 만드는 것 같다.
일정 기간 반복으로
몸이 익숙해져 버린
물리학의 법칙이
인지 체계에게 그 해석권을
넘겨주면서 공식과도 같은
관성의 법칙이
인간 사이의 이해관계,
사회관계, 개인의 특수 감정 감당 능력
들의 변인과 자의적으로
외주 되는 방식으로
누군가에게는
어떠한 기억과 만나
산화된 세상을
이 전의 세상으로 떼어놓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한 개체가
순수하게 기우는 감정을
주체해야 함을 배우기 전
그 기울임이 가는 대로
희생을 배우고 함께함을 배우는 방식으로
그 얽히고설킴을 분리해낸들
의식의 연결고리는
뇌가 작동해야 하는 한
그 얽힘을 분리해내기는
글렀다.
어떤 장면을 무시하려고 해도
더 무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어떤 장면을 눈에 영원히
넣어두고 싶어도 더 머물 수 없었다.
만만해 보이는 것들이 오해였던 방식으로
어려워 보이던 것들 또한 오해였고,
답이 오지 않는 답장에
개인의 Denial 과는 무관하게
아주 오래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인지 개체는 없었다.
배우지 않아도
무수한 반복의 기회를 통해
자기의 정도를 깨달을 수밖에 없는 건
존재하는 인지 개체의 필연이자
운명인 것이다.
운이 좋으면 사랑이 집착으로
여겨지기 전에 그 둘은 서로 각자의
사랑을 정의하고,
더 운이 좋으면
자기가 얼마나 집착과 질투로 인해
단백질처럼 부패하는지를 목격할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더 더 운이 좋으면,
그 무수한 반복의 끝자락에서
사랑이란 개념을 인간을 매개로
증명하려 했음과 타협하고,
지금 내 손에 닿질 않는 그 사람들이
이미 그들의 것임을 인정해야 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곁에서 그들을 만났음을, 나에게도
정말 좋은 친구들이 곁에 있을 수 있었던
그 가능성을 감사하는 방식으로
조용히 더는 보채지 않고
17번 버스를 타고 12월 7일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의
교통정리를 끝냈어도
끝나지 않은 감정의
연속체,
숨 쉼의 연결체,
관성이 가장 좋아하는
숙주로서
좋아하는 사람으로 기우는
에너지를 막을 힘이
약해지는
방식으로
숨 쉼 ability가
이 숙주를 내일로
패스하는 매 순간을
그가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이론”
과 함께하는
중이다.
Do we ever Exist, my love.
...
Yes We do.
in an eternal Man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