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실존의 오차를 줄이는 데 쓰겠다고.
나에
대한 상상력은 무한하지만
타인에 대한 상상력은 꽤
한계적이었다.
원할 수 있는
세상은 혼자서 이루기는 이미
불가능했고,
혼자가 언제부터 혼자였는지
알기 힘든 건
혼자 있을 때 쳐다보는 영상에는
언제나 사람들과 사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혼자 통제 당한다는 느낌이 없이 무엇을 볼 것인지에 대한 통제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자유라고 하면 자유일까.
구분지을 수 있어서 즐거웠던 시간들이 이제는
구분을 했음에도 다를 수 없음에
적잖이 실망이 섞인 방식으로
실망을 투영할 상대가 없다.
(떼를 쓸 사람이 없다.)
혼자 나를 지어야 할 수록
함께하는 삶이 그리운 만큼
공존하는 공간이 버겁다.
어떻게 해야 함을 알 수록
아는 사실에서부터 멀어진다.
개념이 지배하는 현실은
속도가 느리다.
현실에서는 생각보다
느리게 아주 빨리 사건이
벌어지고는 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을 수록
내가 누구인지에서 멀어진다.
그리하여 나를 잡는 훈련을 해야 했다.
잡지않으면 의식의 향연이 이끄는 대로
끌렸다.
젊은이들이
잡고 있는 현실은
그들의
상상력이 확고한 만큼
지켜졌다.
나이가 들수록
어떤 부분을 지키기 어려운 건
협상 기준이 낮아져서인지도 몰랐다.
진입장벽이 산화하는 만큼
유도리 있어졌지만
잃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더 가질 수 있는 능력은 별개였다.
글에 갇힐 수록
삶과의 벽이 두꺼워진다.
글에 갇히지 않는다고 해서
더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냥 살고 있다.
그 그냥이 얼마나
강력하게 우리를 지배하는지
알아내기에 너무 버거워서
그냥 대충 살기에는
대충 사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만
깨닫게 한다/
놓칠 수 있었던 것이 인연인 만큼
놓을 수 없는 것도 인연이지만
인간이라는 보장 아래에서나 인연이지
멀리서 보면 물리 화학적 작용의 스파크와
산화, 퇴화, 화석화 과정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나를 나라고 일컬을 수 있는
상대적 시간이 줄어든다.
통장의 주인은 되기 쉬운데,
실질적으로 한 사람의 주인이 되는 데는
더 많은 복합에너지가 소모된다.
글은 정리가 쉬운데
막상 글 판을 벗어나면
겁에질린 망아지 같이
숨을 데만 찾아다닌다.
그 gap을 줄이는 데
그 훈련을 하는 데 시간을
써보려고 한다.
시간이 존재한다면
생각과 실존의
오차를 줄이는 데
써보기로 했다.
시간이 존재한다면
너무 늦기전에
서로 이미 잊었지만
그 것을 인정하기 전에
다시 만난다면
시간이 존재했다고 치자.
오로지 당신의 눈에 의해
나는 존재했을테니까.
내가 이 인생을 살아냈었다면.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없다면
길은 하나 뿐이다.
나는 그랬던 나로 존재할 수 없다.
그 사람은 계속 도망다니는 당신만 좇을 테니까.
인생에 대한 답은 없다:
인생을 질문한다는 질문부터
오류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