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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tic Eagle Jan 06. 2021

하는 소리(Sorry)들

어른들이


가장 직접적인

어른들이 하는 소리는

내 멀쩡한 인생에 훈수를 두는 것 같아서

본능적으로 잔소리로 분류된다.



서른이 넘다 보니

그 잔소리들은 차마 당신들도

그 선조들의 소리를 “잔소리”로

임의로 분류하여 듣지 않은 결과

그 “sorry”: 불편한 진실들이

자신들의

입을 맴도는 일종의

팩트가 “아는 사람”의 입으로

전해지기에

듣기

싫은 그러한 존재적 패턴의 관습이

생긴 것과 다르지 않음이렸다.


자신들은 밤잠을 설치면서

우리에게는 잠을 잘 자야 한다고 하고,

일종의 제삼자로서 보았을 때

대놓고 모순적인 말과 행동으로

부모님들의 말은 이미 그

효력을 잃었지만



살다 보니 그 언행의

불일치가 일종의 유행이었던 방식으로

그렇게 보란 듯이

돌고 도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지 않아

서른넷 방황하는 삶을 사는

인격체로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인생을

굳이 자신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입버릇은

내가 결코 시초인 것이 아닌 방식으로



내 인생에서는

시초가 되는 이 시점에서

나는 젊은이들에게 입버릇처럼

듣던 고대로 말을 하지만

젊은이들의 눈빛에서는

내가 한 때 나이 든 어른들의 sorry

를 바라보는 씨앗이 보인다.


(뭐지.

이쯤 되면 

모든 건 합리적인 데자뷔 인지도 모른다.)


결국 사회에서 사는 인간으로서

초인적으로 살게 두지 않는

세상이

공평하게 우리 호기심을 담보로

자존심을 저당 잡아

나이와 무관하게

하루의 어느 시점에서는

얼굴이 두꺼워 웃어내야 하는

역사를 만들고야 만다.



허허거린 시간이 많을수록

손이 가는 술의 도수가 세지고

손이 떨림과 무관하게

진한 에스프레소를 찾는다.



그 습관의 가장 큰 수혜자이자 피해자는

바로 본인인 방식으로

술에 취하면 깬다고 고생해야 하고

에스프레소에 취하면 당이 떨어지듯

기분이 추락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감각을 통제하고 몸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마음을 통제할 필요성이 느껴진다.



너무 쉽게 기분을 좌우하는

감각 기관을 좀 쉬게 하는 방식으로

일그러진 내 세상에

나만의 룰이 없이는

너무도 쉽게 마음과 존심과 기분이

날아갔다.



오늘도 저녁이 온다.



잊혀가는 기억을 부여잡고

연락을 해보지만 나도 얼마나 더 당신을

사랑하는지 잴 수가 없는 방식으로

난 나를 시험하는 세월을 이기기 위해

그 사람을 더 잡아보지만,

증발한 수증기를 잡을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인간일 수 있으면서

사람을 지킬 수 있느냐고 묻고 싶지만

그를 지켜온 건 그 사람 본인이지

내가 아니었다.



애착의 방향을 인지하면서

다른 노선을 택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그 방향으로 단숨에 갈 수 없는 것도

물리적인 팩트였다. 



타인의 모든 말들이 의심되지만

그 말들을 곱씹고 있는 건 나였다. 


실제로 더 필요한 건,

그 말이 들리고 곱씹혀도

나 혼자만 들리는 소리에 스피커를 대어야 하는 건

나라는 것이었다.


괜스레 타인의 눈엣 가시가 되기 싫어

조용히 있지만, 말을 하고 씹히나

말을 하지 않고 씹히나 씹히는 건 같았다.



내가 들으면 된다.

내가 내 말을 듣고

내가 나에게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서 하는 소리에 집중하는 것과

별개로

유용할 "통화"를 손에 쥐려면

사회적 언어와 사회에게 할당해야 하는 시간은

따로 있었다. 


그러고도 나에게 돌아올 시간은 많다.

그러고도 나를 챙길 시간은 넘친다.

다만 시간의 차가 있고 공간의 차가 있어서 

한 순간에 너무 자신의 자리가 빠지는 사태가

너무도 쉽게 일어나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까. 


아니, 문제 삼을 만한 문제는 없다.



버젓이 오늘이 왔고,

무력감의 화염 속에 수영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점심을 차릴 시간이다. 



의식이 치는 장난이 눈에 보이면

그에 흔들리지 않지만

흔들리지 않기에는

그 장난은 스릴의 산물이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 순간에 모든 것은

수렴하는 방식으로

그리하여 반복되는 형태에

무게가 실리면서

내가 있었던 듯

없이 지구의 삶은 부득이하게 

영원하겠지. 



Sorry is a Sorry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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