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인지 가능 개체로
내가 벗어나려는 것의 본질은
내가 나라고 할 때 통상 적용되는 기준은
몸의 상태, 뇌의 상태인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나로 정의할 만한 기본 기준은
나를 키워온 사람, 나에게 존재적 권한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엮인 정도, 그 색깔, 그 향기와 맞물려 있는 방식으로
나의 것만은 아닌 방식으로
나의 것들이라 여길만 한 것들은
나의 유전적 환경을 쉽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 집안의 유전자가 닦아놓은 길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려하면
초기 비용과 입장 비용이 들었다.
결코 한 세대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에 의해서나 내가 특별하지
모두들 아주 객관적인 방식으로
각자의 왜곡된 시선 속에 살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네들의 공통분모는
각자가 자신을 객관화하겠다는 오류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 또한 그것을 결정해줄 심판자의
부재로 임의로 정해진 룰에 그 정의를
맡기는 역사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비슷한 사람이었으면
오차를 느낄 겨를이 없겠지만
다른 사람끼리 만나면
공존하는 데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내가 얼마나 나를 객관화시키든
나는 어떤 네트워크에 이미 갇혀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방식으로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소리가
상상력에 한정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현재 거주하는 곳도
나를 선택적으로 선택하지도
실제로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겠다는
방식으로 나는 어디에서든
어떻게든 숨 쉬고 있었다.
이제 좀 알 것 같다는
확신 편향이 우스운 만큼
나는 이 생각이 최고로 중립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럴 수 있는 만큼
상황에서 감정이입을 덜 할 수 있었지만
막상 기분 나쁠만한 상황 앞에서
기분이 나쁘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생각을 덜 해도 되고
덜 괴로워도 되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살다 보면
삶을 정당화하면서
살 것이다.
그렇게 삶이 왔다가
잠이 들 때면 의식을 내어주는
정화를 반복하면서
모아지는 것들이 다시
나를 살리는 그 패턴이 반복하겠지.
패턴이 문제도 아니고
또 뜨는 내일의 해가 문제도 아닌 방식으로
괜찮아져야 하는 하루가
겁난다.
아니, 겁나지 않는다.
겁내는 습관을 들였을 뿐이다.
길을 잃었다.
길을 없앴으니까.
그래도 길을 걷지 않고서는
이 곳에서
저곳으로 갈 수 없었다.
인생이란 거대한 흐름은
이미 시작되었고
난 잠시 인간의 몸을 빌려
이 구체적인 개체를
특수한 family tree를
그들의 해류 속에서 살았다가
여기고 몸은 두고
의식은 우주에 반납하겠지
시간이 없기에
시간이 없다는 건
시간이 없다는 말에 의해서
존재한다.
그렇기에
존재하는 단가는
시간이 인지되는
시차에 의한 감에 의해
그 차이로 인해 존재한다.
당신이 나를 보고
내가 당신을 봤을 때.
세상의 모든 시간이 밀려서
우리 둘만 존재하게 했던
그 시간
그때만이
시간이었다.
잠시 방문”했”던
개체로서 나는
“시간”을 만들어 채울 것이다.
just to live to think about us.
우리를 생각하려면
살아있는 시간만이
그를 허용할 테니까.
그래서 영화들을 만드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본인만큼
그 이야기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그 이야기도
시간이 포화할수록
미화되니까.
그래서 사랑하면
곁에 둬야 한다.
놓아주면
놓아지는 게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