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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tic Eagle Jan 04. 2021

  ㅋ

그저 웃는다. 아니, 거저 웃는다.


인내가 바닥이

날 때가 있다.

괜시리 내가 멋대로 해도

떠나지 않을 사람한테 다 쏟아낸다.


진정한 멘붕은 그 상대가 떠날 때 온다.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그 상대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그로 인해 나에게 닥칠 부득이할

혼돈이렸다.



그러면 좀 알게 된다.

언제고 받아 줄 것 같은 사람의 그

사랑의 방식 또한 결과적으로 그 관계가

부서져야 했기에

옳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면 알게된다.

대체 옳은 건 뭔데.

깨지지 않았다고 해서 더 옳지도

않고, 깨졌다고 해서 옳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사태를 멀쩡한 정신으로

견디는 데 한계가 있고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멀쩡한 정신은 어떻게 정의하는가.


이렇게

엮고 엮고 따지고 따져도

다음 순간이면

깡그리 잊은 것만 같다.


대체 뭘 위해 삐진 것이며,

나의 짜증의 출처와 목적을

알아낼 수가 없다.



그냥 무조건적인 관심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냥 무시해버리기 위해.

그 순간의 희열을 위해.


그러나 다음 순간은 오고야 만다.

그러면 나는 내가 저지른 대로 무시당하는 방식으로 불가피한 상황이

그 사람 대신 복수를

해준다.


돌고 돈다.

얻은만큼 잃고,

그렇다고 이 공식이

늘 같이 적용되지도 않는다.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우연이 아닐 뿐이다.

오늘따라 기분 좋은 사람이 많은가보다.


아니;

그냥 기다리던 답장이

오지 않았을 뿐이다.


답이 오지 않을 공간에서

서 있겠다는 의도가

사랑이냐고,?


아니;


사람이라서

지금 내가 자존할 수 있는

그리하여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버텨보는거야.


그런데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내가 하겠다는 사랑에도

내가 결과적으로 이기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가보다.



어떻게 견딘 시간인데 계속 붙들고 있어야하는지

어떻게 해도 안될 것 같기네 놓아야하는지

계속 가보는 수밖에.


제 3 자들은 결론을 안다.


그리하여 내가 사는 세상이

어리석든, 훌륭하게 실패해가든

고유한 값을 가진다.


결론을 알지만

의심해보는 어리숙함.

그 어리숙함조차 어리숙할 수 없는

그 어느 즈음에

나는 널 잊고 잘 살고 있겠지.


결코 잊지 않을 방식으로.



사랑은 두는 것이다.

사람으로 만나서

살아야하기에

살짝 가끔씩은 아주 성가실 뿐이다.



헤어지자.


사랑을 지키기 위해.



외롭겠지.

그 단어가 더 웃긴 월요일이다.


외롭다....


외로움....


... 결론을 낼 수 없다.

생각은 또 시작점에서 기웃거린다.


보고싶다 다시 니가.

놓아질 수 없는 것도 인연의 축에 속한다면

나 당신의

인연일까.



아직도 당신을 나의 연인이라

일컬어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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