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웃는다. 아니, 거저 웃는다.
인내가 바닥이
날 때가 있다.
괜시리 내가 멋대로 해도
떠나지 않을 사람한테 다 쏟아낸다.
진정한 멘붕은 그 상대가 떠날 때 온다.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그 상대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그로 인해 나에게 닥칠 부득이할
혼돈이렸다.
그러면 좀 알게 된다.
언제고 받아 줄 것 같은 사람의 그
사랑의 방식 또한 결과적으로 그 관계가
부서져야 했기에
옳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면 알게된다.
대체 옳은 건 뭔데.
깨지지 않았다고 해서 더 옳지도
않고, 깨졌다고 해서 옳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사태를 멀쩡한 정신으로
견디는 데 한계가 있고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멀쩡한 정신은 어떻게 정의하는가.
이렇게
엮고 엮고 따지고 따져도
다음 순간이면
깡그리 잊은 것만 같다.
대체 뭘 위해 삐진 것이며,
나의 짜증의 출처와 목적을
알아낼 수가 없다.
그냥 무조건적인 관심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냥 무시해버리기 위해.
그 순간의 희열을 위해.
그러나 다음 순간은 오고야 만다.
그러면 나는 내가 저지른 대로 무시당하는 방식으로 불가피한 상황이
그 사람 대신 복수를
해준다.
돌고 돈다.
얻은만큼 잃고,
그렇다고 이 공식이
늘 같이 적용되지도 않는다.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우연이 아닐 뿐이다.
오늘따라 기분 좋은 사람이 많은가보다.
아니;
그냥 기다리던 답장이
오지 않았을 뿐이다.
답이 오지 않을 공간에서
서 있겠다는 의도가
사랑이냐고,?
아니;
사람이라서
지금 내가 자존할 수 있는
그리하여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버텨보는거야.
그런데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내가 하겠다는 사랑에도
내가 결과적으로 이기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가보다.
어떻게 견딘 시간인데 계속 붙들고 있어야하는지
어떻게 해도 안될 것 같기네 놓아야하는지
계속 가보는 수밖에.
제 3 자들은 결론을 안다.
그리하여 내가 사는 세상이
어리석든, 훌륭하게 실패해가든
고유한 값을 가진다.
결론을 알지만
의심해보는 어리숙함.
그 어리숙함조차 어리숙할 수 없는
그 어느 즈음에
나는 널 잊고 잘 살고 있겠지.
결코 잊지 않을 방식으로.
사랑은 두는 것이다.
사람으로 만나서
살아야하기에
살짝 가끔씩은 아주 성가실 뿐이다.
헤어지자.
사랑을 지키기 위해.
외롭겠지.
그 단어가 더 웃긴 월요일이다.
외롭다....
외로움....
... 결론을 낼 수 없다.
생각은 또 시작점에서 기웃거린다.
보고싶다 다시 니가.
놓아질 수 없는 것도 인연의 축에 속한다면
나 당신의
인연일까.
아직도 당신을 나의 연인이라
일컬어도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