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는 말에 내 스스로가 반박할 수 있을 때면
나는 나의 편보다 타인의 편에서 나를 깎아내린다.
나대다가 깨달은 겸손의 정도는
자신이 컨트롤하는 겸손이지만,
늘 겸손해야 한다는
사회적으로 물려받은 인위적 유산은
나를 제대로 소심하고도 혼자 있는 곳에서야
비로소 큰소리 칠 수 있는
이중적 인간을 경험하게 한다.
내 세상은 집 안의 평수에 국한되지만
유선으로 경험하는 간접 세상이 곧 내 세상인듯
여행하는 기분이 드는 건 나의 능력일까
나의 완전한 무능력일까.
그 구분 또한 기준선이 모호해지는 것이
나의 무능력에 덜 민감하게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능력과는 상관 없이 내가 자극받는
또 하나의 세상일 뿐인걸까.
나의 영역을 거의 없애면
“진정”한 나를 만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없어질수록 타인의 의도로 하루가
채워졌다.
나를 잃을까 두렵지는 않다
잃어봤으니까.
다시는 잃고 싶지 않다.
잃어봤으니까.
그래도 잃어야하는 상황은 반드시 올 것이다.
잃어봤으니까.
그래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
처음 그랬던 것처럼
흔들리고
호기심이 생기고
충분히 나를 내어 줄 것이다.
시간이든, 돈이든, 웃음이든.
나의 친구가 한 말이 떠오른다.
만남은 곧 손해를 감수해야 이루어진다는 것.
그 손해가 거듭하면서 손익분기점을 비로소 만난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를 만났다면
운명이어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내가 널 만났다고
네가 날 만난 게 아닌 건
운명일 수 있을까
그리하여 셰익스피어는
희극만 세상에 내어 놓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