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서부터 일어나는
20 번 정도의 허탈감을
노력해서 무시하다보면 그는
더 이상 나를 통제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꽤 버거운 채
흘러갔다. 괜시리 친구에게 우울하다고
문자해보지만, 실제로 괜찮아졌을 때 쯤되면
답이 왔다.
“우울하다”라는 단어가
타인의 “우울하다”라는 말과
맞물리면 본능적으로 자신의 우울함부터
사수하고 싶다.
우울함도 내가 제일 우울해야 하고
행복도 내가 젤 행복한 것 같아야 하는
자기 절대 중심주의에서
타인과 공유하면서 느껴야하는 건
나에 대한 이기적인 애착과
타인의 좋은 일에 대한 본능적인 시기심과
그럼에도 소외되지 않고 싶은 타인의
나에 대한 관심 할애 정도에 대한 은근한 집착이다.
그리하여
좋은 안주를 사이에 두고
똑
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해도
적당히 알아서 편집해서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서론적으로 본론적으로 결론적으로
삶에서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중 하나이다.
벨기에의 정신분석학자 paul verhaeghe는
성공을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주고
알아봐주는 것에 있다고 했다.
꽤 동의했다.
내가 존재하려고 하는 방향의 저 멀리서
내가 노력하려는 것들에
색다른 눈으로 나를 봐주는 사람들 곁에서
있었을 때 나의 미적, 예술적 재능에는
한계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편견을 가지지 않은 만큼
존재적으로 훈수를 두려할 정도로까지의
관심이 없었다. 인간적으로 불편하지 않은 거리에서 서 있으며 서로의 걸음마에 응원할 정도의
“좋은 마음” 만으로도 개체는
성장하고 있었다.
다만 오래 알던 사람과의 사이에서는
애”정” 혹은 애”착”의 비이성적인
그리고 합리적인 개입으로
너무도 불가피하게
“내는 니를 너무 잘 아는” 팩트와
결코 알려고 하지 않는 hidden agenda 사이에서
거리적으로 얼마나 가까운 것과는
완전히 무관하게도
알던 사람은 모르던 사람과의
알아도 되는 정도의 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리에서 맴돌며
뻔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그들을 보려고 하는 건
집단 의식의 버릇일 뿐, 그를 지나치게 의식해야 하는 자의식 또한 집단 의식이 치는 장난의 일환으로
알 것 같은 사람이 낯설게 보일 때만큼 배신감이 클 때는 없고, 낯선 사람이 익숙하게 들어올 때만큼
내 마음이 기우는 때는 없는 방식으로
헷갈리곤 한다.
때로는 사랑하지만 더 좋아할 수 없는 것들이
버겁고, 좋아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이
애틋해야 하는 방식으로
결국 일련의 의식의 지도 속에서
하루를 돌아다니는 건
이 사람, 바로 나에 의해서나 존재한다.
그리하여 내가 나를 알아보면
충분하다.
착각을 이용해 욕심을 부릴 수 있다면
단 한 사람이라도 나의 존재에
좋아요 버튼을 눌러주면 좋겠다는 것.
딱 하나의
좋아요도
그를 받아들이는 자의 입장은
80억 인구의 좋아요와 맞먹는
중력과 힘이
실린다는 것이다.
인정...
희한한 개념이다.
무시하고 살기에는 매 순간
그 상황을 갈구하고;
집착해서 살기에는 그
개념에 욕심만 실린다.
마스크를
쓰고 산 날의 횟수에 비례하여
마스크 안에서 숨 쉬어지는 시간이
줄어든다. 무언가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폐의 기능을 상실해가는 것 같다.
본질과 본질이 아닌 것을 구분하기도 전에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고 있었다.
어디 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살아있음과
살아야 함과의
타협점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살아있음에
타협이라는 단어를
선택하려는 특유의
시선이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나의 어느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