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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tic Eagle Jan 11. 2021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           바로 나


일어나서부터 일어나는

20 번 정도의 허탈감을

노력해서 무시하다보면 그는

더 이상 나를 통제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꽤 버거운 채

흘러갔다. 괜시리 친구에게 우울하다고

문자해보지만, 실제로 괜찮아졌을 때 쯤되면

답이 왔다.



“우울하다”라는 단어가

타인의 “우울하다”라는 말과

맞물리면 본능적으로 자신의 우울함부터

사수하고 싶다.



우울함도 내가 제일 우울해야 하고

행복도 내가 젤 행복한 것 같아야 하는

자기 절대 중심주의에서

타인과 공유하면서 느껴야하는 건

나에 대한 이기적인 애착과

타인의 좋은 일에 대한 본능적인 시기심과

그럼에도 소외되지 않고 싶은 타인의

나에 대한 관심 할애 정도에 대한 은근한 집착이다.



그리하여

좋은 안주를 사이에 두고

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해도

적당히 알아서 편집해서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서론적으로 본론적으로 결론적으로

삶에서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중 하나이다.



벨기에의 정신분석학자 paul verhaeghe는

성공을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주고

알아봐주는 것에 있다고 했다.

꽤 동의했다.


내가 존재하려고 하는 방향의 저 멀리서

내가 노력하려는 것들에

색다른 눈으로 나를 봐주는 사람들 곁에서

있었을 때 나의 미적, 예술적 재능에는

한계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편견을 가지지 않은 만큼

존재적으로 훈수를 두려할 정도로까지의

관심이 없었다. 인간적으로 불편하지 않은 거리에서 서 있으며 서로의 걸음마에 응원할 정도의

 “좋은 마음” 만으로도 개체는

성장하고 있었다.



다만 오래 알던 사람과의 사이에서는

애”정” 혹은 애”착”의 비이성적인

그리고 합리적인 개입으로

너무도 불가피하게

“내는 니를 너무 잘 아는” 팩트와

결코 알려고 하지 않는 hidden agenda 사이에서

거리적으로 얼마나 가까운 것과는

완전히 무관하게도

알던 사람은 모르던 사람과의

알아도 되는 정도의 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리에서 맴돌며

뻔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그들을 보려고 하는 건

집단 의식의 버릇일 뿐, 그를 지나치게 의식해야 하는 자의식 또한 집단 의식이 치는 장난의 일환으로

알 것 같은 사람이 낯설게 보일 때만큼 배신감이 클 때는 없고, 낯선 사람이 익숙하게 들어올 때만큼

내 마음이 기우는 때는 없는 방식으로

헷갈리곤 한다.



때로는 사랑하지만 더 좋아할 수 없는 것들이

버겁고, 좋아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이

애틋해야 하는 방식으로

결국 일련의 의식의 지도 속에서

하루를 돌아다니는 건

이 사람, 바로 나에 의해서나 존재한다.



그리하여 내가 나를 알아보면

충분하다.

착각을 이용해 욕심을 부릴 수 있다면

단 한 사람이라도 나의 존재에

좋아요 버튼을 눌러주면 좋겠다는 것.



딱 하나의

좋아요도

그를 받아들이는 자의 입장은

80억 인구의 좋아요와 맞먹는

중력과 힘이

실린다는 것이다.



인정...


희한한 개념이다.

무시하고 살기에는 매 순간

그 상황을 갈구하고;

집착해서 살기에는 그

개념에 욕심만 실린다.



마스크를

쓰고 산 날의 횟수에 비례하여

마스크 안에서 숨 쉬어지는 시간이

줄어든다. 무언가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폐의 기능을 상실해가는 것 같다.


본질과 본질이 아닌 것을 구분하기도 전에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고 있었다.

어디 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살아있음과

살아야 함과의

타협점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살아있음에

타협이라는 단어를

선택하려는 특유의

시선이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나의 어느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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