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쉬워야 하는 이유는
여정에서 만난 꽤 좋았던 시간을 만들었던
누군가의 흔적을 묻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돌아와서 만나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있던 기억에 지배되는 진부함에서
사실 벗어날 수 없는 어떤 특정한 관계와는
다른 그 관계에서 오는 에너지는
진부할 수가 이미 없으니까.
다시 돌아가야 하는 비행기는
나를 다시 진부함의 소나기에 밀어넣듯
가차없이 나를 보냈다.
다시 올 수 있지만
같은 방식의 사람들을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늘 나의 변형된 상태는
그 상태와 비슷한 모형의 사람들을
끌어당기기에
누구를 내 시간에 넣을 수 있었느냐는
곧 나의 상태를 알 수 있는 방법이 되었다.
이 모든 경험의 씨앗, 줄기, 뿌리를
“나” 의 현존에 수단으로 여기기엔
그 만난 사실들이 너무 넘치게 고맙고
넘치게 아름다웠기에
지금 글로 그 경험의 형상을
새기기에는 글이 너무 아프다.
아마 모든 경험의 뿌리를
상실에 두는 성향을 지닌 내 특유의
1 차 성향이
즐거워하고 끝낼 일들을
상실의 장면으로 재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 분을 알았든 10 분을 알았든
10 년을 알았든,
만남은 그 자체에 소용을 다 하는 것이다.
그 formula 가 어떤 방식으로 전향하든
두고볼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
아쉬운 방식으로
두고 볼 수 있던 사람들 곁으로
돌아간다
사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