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ly?
내가 본다고 생각하는 영역만큼
타인들이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건
지나친 자기 의식에서 오는 것일까.
지나친 자기 의식은
내 속에 내가 너무 많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incomprehensible Input 과
incomprehensible Output 의 불균형으로
나라고 여겨지는 불완전한 자아와
나를 통해 표출된 모습의 불합리한 공존으로
헷갈리는 세상에 살게된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리하여 나의 세상에 나를
어중간하게 가두면서 지키려 할 수록
표현되어야 마땅한 인간적 모습까지
감추기에
정녕 내가 누구냐는 질문에 솔깃하겠지만
그 질문의 해답은
자기 손으로 자아를 부서뜨리고 나봐야
알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없다는 것.
없는 것을 알면 알게 된다.
내가 있다는 것을.
그 때부터 나는 시작된다는 것을.
결국 혼자서 태어나
자란 것이 아니라는 fact 가
나를 인간관계 속에
영원히 얽히게 하지만
그를 풀어내도 얽혀지내야 하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을 누리는
일종의
대가 인 것 같다.
There’s always a price to pay
스쳐지나는
사람들을 읽고자 하는 의도는
불가피 하다.
신변 보호의 일종으로.
그래서 타인들을 본다고 착각하지만
나는 내가 나를 이해하는 정도를 볼 뿐,
타인들이 본다는 나 또한
몇 억개의 페르소나를 지닌 눈들이
판단하고자 하는 자기 환영일 뿐이다.
검은 머리
동양인 여자
에 대한 매우 단순하고도 일관적인
시선과 기대에 대해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러나 누구는 나를 매우 조심스럽게 취급하고
누군가는 매우 인격이 부재한 검은 머리 인형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알아채야 했다.
같은 국민들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선입견에 상대한 태도 정도의 그것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이러한 테이터가 시간에 걸쳐
내 직관역에 수집이 되자
타인을 대하는 정도와 태도는
정확하게
자신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
자신이
받았던 태도,
그리고 자신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반영하는 태도를 드러낸다는 것 정도는
알게 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유동적이고
시간에 걸쳐서 변하기에
절대적일 수 없지만
현재 프레임에서 나를 지키면서
나를 함부로 대하는 타인들과
공존하는 데
유용한 정보를 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자기 어필,
말로서 상황을 정립할 필요가
여기서 생기고 있었다.
나는 말을 하지 않고도
상황에서 벗어나려 하는 부류이다
아직도.
그러나 오해없이
상황을 (+) 극으로 바꾸고
그 관계를 다음 레벨로 옮길 수 있는 것은
그래도 해야 하는 대화였다.
무언으로 숨으면
내 세상은 완전히 지켰지만,
그 완전함은 늘
불완전한 그리움이었으니까.
널 안다고 자부했지만
넌 결코 내가 착각하고 있던 사람인 적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나 또한 너가 안다고 여겼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럼에도 우리는 아는 사이라는 것.
시간과 경험의 evolution이
이끄는 방향이 달랐기에
멀어졌다는 것.
그러나 그 방향의 어느 시점에서
다시 교차할 것이라는 것.
다시 만나자.
반드시.
그리고는 헤어지자.
감도는 어색함에 적지않게 놀라면서.
그리고 그리워 하자.
서로의 아무것도 아닌 채
모든 것이었던 그 때를.
Bon Voy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