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수 있음이 보장하는 축복
갈구했던
첫 관심의
돌아오지 않음이
나를 여기까지 이끈 것은
아닌 지에 대한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알게되어야 할
것들 중 하나가
'바라던 관심이 내가
원하는 순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족에게 가장
섭섭함이 크고,
가까웠던 사람에게 가장 섭섭하지만
한 사람이
결코 해결해줄 수 없는
개인의 니즈가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학교라는 틀을 벗어나서
부딪히며 살면서
결코 내가 태어난 곳에서
받을 수 없는 관심을 받고
말을 듣고,
대화를 나눈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비로소
세상에 대한 삐짐을
어느 정도는 해결한
것 같았다.
절박하면
돈을 써서라도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싶고,
때로는
돈을 쓰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관심도
있었다.
돈.
보여지는 대가의 힘은
적지 않았다.
때로는 그렇다.
시선 한 번 맞추려고,
악수 한 번 하려고,
내 닉네임이 방송에서 언급되는 순간을
위해
투자해야 하는 시간과
돈에 대한 생각을 한다.
때로는
어린 시절
그 받지 못한 관심에의 해결은
당장은 해결되지 않은 채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내 안에서
기생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 대한 가치 판단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돈을 투자한 관심은
액수가 늘어야만
관심이 유지된다는 원리를
깨달으면,
그 사건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자연 현상의
일종임을 안다.
인지 현상의
자연스러움임을 안다.
그리하여
오래 머무는 자도 없고,
오래 머문다고 해서 진지하지도 않고,
빨리 떠난다고 해서
덜 진심도 아닌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모두의 '자신'이
버티고 있는 듯 보인다.
삶을 경험하고,
기록하고,
지우고,
다시 채우고,
버리고,
다시 쌓아두고,
웃고,
울고,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어쩌면
만날 때 헤어질 타이밍을
알 수 밖에 없기에
만남을 조심스럽게 여길 수 있음이
만남이 소중할 수 있음이,
그리고 헤어짐이 축복일 수 있음이
산다는 guts(용기/배짱) 인지도 모른다.
첫 관심은 얻었고,
그 다음으로
받을 수 없는 같은 정도의 관심은
화
섭섭함을 보장한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해야 하는
과정에서
삶에의 개인적인 힘이
시작되고 생기는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발견하는 건
자신에 대한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관심으로 가는
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