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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Dec 08. 2016

39도의 마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는, 몇 도가 가장 적절할까.

오늘의 추천곡은 가수 안녕하신가영님이 부르신 <우울한 날들에 최선을 다해줘>입니다. 특유의 맑은 목소리에 마음까지 밝아지는 기분입니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감사합니다 :)








‘청민아, 여전히 멍청하니?’


S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지내느냐는 말 바로 뒤에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당황했지만 원래 나와 이렇게 장난을 잘 치는 선배였기에, 언제나 그랬듯이 되받아 쳐주었다. 네, 선배, 저 여전히 멍청해요. 근 1년 만의 전화였다. S선배는 나와 대학시절 모스크바 어학연수를 같이 갔던 하늘 같은 06학번 선배였지만, 함께 반년을 동거 동락한 이후 하늘은 아니고 그냥 친구 같은 선배가 되었달까. 장난 속에 싹튼 진심을 알기 때문에, 나는 선배가 늘 고맙다.


여전하다


선배는 나에게 여전하냐고 물었고, 나는 여전하다고 답했다. 전화를 끊고 기분이 이상했다. 여전하냐니. 점점 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여전한 것이란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싶었다. 세상도 세상이지만 사람만큼 여전하지 못한 존재가 없을 테니까. 나만해도 하루에도 수십 번 다른 사람이 되는데. 누군가에겐 둘도 없는 좋은 사람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한없이 비겁한 사람이자, 또 다른 이에겐 흔적도 없을 수도 있는 게 사람인데. 상대와 상황이 어떤가에 따라 팔색조로 변하는 사람이 어떻게 여전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 때문일까, 선배의 흔한 질문은 나로 하여금 슬픈 실망감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내게 선배는 여전하냐고 물었고, 나는 여전하다고 답했다.






사람이 가장 어렵다.


사람이 가장 어렵다. 사람을 만나 마음을 나누는 것이 이제는 조금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첫 발을 내디딘 사회에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이라곤, 사람은 언제든 자신의 입장에 따라 낯빛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겐 언젠가부터 변한 것 하나 없다, 여전하다 같은 말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관계 속에서 유연히 대처하지 못하는 어리숙한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 한결같은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했었지만, 나도 별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렸을 적 만난 사람들과는 다른 마음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대하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어렸을 땐 서로의 감정을 책임져주며 토닥여줬지만, 사회에선 서로의 감정을 굳이 책임질 의무가 없었다. 내게 실수한 상대의 죄책감까지 신경 써 줄 이유도, 여유도 없는 것이다. 모두 언제든 남이 될 수 있는 위치에서, 굳이 이곳을 벗어나면 남이 되는 공간에서 상대에게 굳이 친절할 이유가 무엇일까. 내게만 피해 주지 않고, 자기 일만 똑바로 하고, 알아서 자기관리 잘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여전하냐는 선배의 그 말이 내 마음을 금세 어지럽혔다. 그 말에 이상한 괴리감을 느끼면서도, 뜨거운 향수를 느꼈달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기까지, 나는 꽤 외로웠다. 네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을 때마다, 그 마음 받아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가끔 다른 의미로 곡해될 때마다, 완전히 다른 상황으로 와전될 때마다 많이 외로웠다. 사람의 숲에서 나는 그렇게 종종 길을 잃었다. 요령이 없어서, 길을 몰라 그랬다. 한 때 분명 무슨 일이 있는데도 물으면 괜찮다고만 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 선을 깨서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그 사람의 선은 너무나 정확했다. 말을 아무리 붙여 보려 해도 거기까지, 그래 딱 거기까지. 보이지 않는 선이 나와 그 사람 사이에 그어져 있었다. 사회에서 만난 대부분의 관계가 그랬다.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내 생활방식 안에 굳이 넣을 필요가 없었다. 때때로 친한 친구들조차 마음에 다 들지 않는데, 사회에서 만난 불편한 사람을 굳이 그 안에 넣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 사람과 내 사이의 온도는 극명했고, 우리는 결국 온도를 맞추지 못한 채로 서로를 그저 ‘아는 사람’ 정도로 정의시켜버렸다.





사람 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온도를 맞추는 일이었다. 때때로 나는 너무 뜨거워 쓸쓸했고, 너무 차가워 외로웠다. 이렇게 몇 번씩 열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머리가 핑하니 어지러웠다. 어느 온도에도 마음을 담그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일은 혼나고 배우면 되지만,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마음을 내어주고 상처를 받게 되면,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었기 때문에. 어렸을 적처럼 친구 가랑이를 붙잡고 하염없이 울고 털어내면 끝이 아니라, 마음을 수습하고 마음에 따른 상황을 정리하는 것 모두가 온전히 내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는, 몇 도가 가장 적절할까. 집 근처에 목욕탕 하나가 있는데, 그곳엔 두 개의 탕이 있다. 39도와 43도. 더운 것을 잘 못 참는 나는, 언제나 39도 탕을 선호했다. 딱 좋았다. 43도는 조금만 앉아있어도 몸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아 싫었다. 목욕탕의 모든 샤워기도 늘 39도로 맞춰져 있었다. 이를 평균온도로 정해놓는다 해도, 아무도 토 달지 못할 것 같았다. 너무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그런 온도. 사람의 체온보다는 조금 높으면서 기분 좋게 따듯한, 과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딱 기분 좋게 적당한 온도였으므로.


아마 39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9 도면 족하지 않을까. 굳이 냉탕처럼 냉소적일 필요도, 잘 알지도 못한 사람에게 열탕처럼 온 마음을 다 쏟을 필요도 없이, 적당히 서로의 선을 지키면서 책임질 수 있는 범위의 온도면 서로에게 족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생각하는 어른은 책임지는 존재다. 그것이 아주 작은 마음이건, 약속이건, 행동과 상황 그리고 마음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 어른들에게 39도는 서로의 마음을 적어도 대우하고, 책임질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온도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39도의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다짐해본다. 대학을 졸업하고 가장 어렵게 느꼈던 문제를 화장기 하나 없는 맨 얼굴의 사람들 사이에서 깨닫는다. 목욕탕 샤워기에 기본으로 정해져 있는 온도, 누구나 거부감 없이 꽤 기분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아주 보통의 온도. 아마 이 정도의 온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너무 차갑지도 그렇다고 너무 뜨겁지도 않은 평범한 온도이지 않을까, 적당히 베풀고 적당히 책임지는 괜찮은 온도지 않을까. 하루의 피곤을 풀려 들어온 39도 탕에 앉아 그런 생각들을 했다. 39도, 이것은 이기적인 어른의 온도가 아니라, 여전하지 못한 세상에서 적어도 이 정도의 온도로 사람을 사랑하고 살겠다는 어른의 의지 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온도로 마음을 책임질 수 있는 범위에서 토닥토닥 살다 보면, 서서히 깊어지고 서서히 진해지는 사람들이 생기겠지. 작은 것부터 조금조금씩 손 내밀다 보면, 마음을 온전히 다 내비쳐도 괜찮을, 언제나 여전해도 좋을 사람들이 또 생기겠지. 누군가에게 마음을 깊이 쏟았지만 응답하지 않는 태도에 또다시 마음 상했던 어느 날, 다짐과는 반대로 여전히 어지러웠던 그 어느 날. 나는 39도 탕에 앉아 39도의 마음으로 적당히 살아야지 다짐, 또 다짐하곤 했다.








글│ 청민  淸旻

사진│ https://unsplash.com/




덧붙이는 청민의 말 │일상 수필, 그  열네 번째


<39도의 마음>은

지친 어느 밤, 친구들과의 편안한 자리에서 풀어놓는

넋두리처럼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사람 관계에서 슬픈 실망감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희망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어떤 넋두리로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올해는 유난히 '오랜만이에요'라는 말을 많이 쓴 것 같습니다.

모든 큼직한 일이 잘 마무리되었으니,

자주 뵈어요 :-)


기다려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따듯한 저녁 되시고,

남은 오늘의 순간도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행복하시기를

응원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






아주 날 것의 감정을 담는 곳입니다. 투박하지만, 그래서 좋아하는 공간이지요.

날 것의 마음만큼 솔직한 사랑은 없으니까요.


@청민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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