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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Jan 19. 2017

이별 숙취

이별은 어쩌면 술 마신 다음 날 찾아오는 숙취 같아.

오늘의 추천곡은 가수 정준일님(윤종신님)이 부르신 <말꼬리>입니다. 절절한 목소리와 가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아려오는 곡입니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감사합니다 :)









이별은 어쩌면 술 마신 다음 날 찾아오는 숙취 같아.


얼큰히 취한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주량은 맥주 두 잔. 한 잔을 마시면 기분 좋게 취하고, 두 잔을 마시면 헤롱헤롱 취한다던가. 술을 잘 하지도 못하는 그녀가 숙취라는 단어를 말하다니.


그녀는 술이 써서 싫고 몸이 안 맞아 싫고 정신이 혼미해져 싫다는 말을 친구들 앞에서 종종하곤 했다. 그녀가 술이니 숙취니 말할 때마다 함께 있던 친구들은 폭소를 터트렸다.


야, 네가 숙취를 논할 껀덕지는 안되지, 하며.





나와 오래된 친구인 그녀는, 같은 대학을 다니던 동갑내기 친구와 3년을 사귀었다. 주변 사람들은, 쟤네는 꼭 결혼을 할 것 같다는 말을 종종하곤 했다. 요즘 애들 치곤 제법 오래된 연인이었다.


그녀의 남자 친구는 나도 몇 번 스친 적이 있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꽤 괜찮은 느낌을 가진 남자였다. 그녀가 우리와 함께 있을 때면 매시간 꼬박꼬박 그에게서 연락이 왔고, 언젠가는 그녀의 신발 끈을 묶어주려고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때 그녀는 애정 섞인 눈동자로 그의 뒤통수를 살며시 쓰다듬었는데, 우연히 목격한 그녀의 눈빛이 꽤나 낯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우리 모임에서 그와의 이별을 전했다.


"나 그 남자 뻥 차 버렸어."


폭탄선언을 하며 그녀는 깔깔 웃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는 지금껏 그 남자에게서 받은 상처를 우리 앞에 풀어놓곤 했는데, 이야기를 듣는 우리조차도 화가 날 때가 많았으니까.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정확한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아마 상처들이 쌓이고 쌓여 흉터가 깊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날 나는 그녀가 잔뜩 취해서 했던 말을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아마도 그녀는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야, 내가 산을 되게 좋아하잖아.

그래서 걔한테 같이 가자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딱 한 번을 안 가주더라.

앞으로는 산을 싫어하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함께 가주는 남자를 만나고 싶어.


내가 너무 소중해서 말이야."





그녀는 세상 멀쩡하게 지냈다. 내가 곁에서 지켜봤던 몇 번의 맺음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마음 약하고 눈물 많은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우리 앞에서 떠들고 농담을 하며 지냈다. 그와 안녕을 고한 이후로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 후로 반년이 지났고, 친구들과 아주 오랜만에 자취방에 모였다. 각자 사는 것이 바빠서 겨우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직접 만든 음식, 맥주, 그리고 그녀를 위한 오렌지 주스를 상에 올려놓았는데,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술을 좀 마셔줘야겠어."


나는 그녀가 내민 잔에 맥주를 가득 따라 주었고, 그녀는 시원하게 한 모금을 들이켰다. 아무래도 그날 밤은 종일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녀의 꿈은 방송작가였다. 일주일에 한 번은 교육원에서 수업을 들었고, 수업이 없는 날은 식당에서 설거지를 했다. 매일 12시간씩 설거지를 하고 나면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밤마다 울면서 글을 썼다. 아마도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글을 쓴 것 같았다. 그러나 글을 쓰는 것으로 외로움이 다 해소되지 않으면, 그녀는 홀로 맥주 두 캔을 마셨다. 그러고 나면 그의 기억이 잊히기라도 할 것처럼.


그에게 닿고 싶은 밤.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새벽.

그에게만 들키고 싶은 수많은 문장.


상처를 받는 날이면 그녀는 그의 기억을 다시 꺼내었다.



이미 구겨져버린 그와의 기억을 새 것처럼 펴 그를 안고 싶었다.


그럴 때면 그 남자에게 받았던 수많은 상처들은 모조리 흩어졌다. 그 남자가 잘해주었던 것만 기억이 났다. 길을 걷다 신발 끈을 묶어주던 모습, 추운 날이면 잡은 손을 주머니에 넣어 주던 모습, 먹기 좋게 자른 음식을 접시에 올려 주던 모습.


잊힐 줄 알았던 그의 기억은, 맥주를 비워내는 만큼 더 선명해졌다.






이별은 어쩌면 술 마신 다음 날 찾아오는 숙취 같아.


그녀는 잔에 남은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키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얼큰히 취해 침대에 누울 때마다, 만약 그에게 전화가 온다면 그가 어떤 말을 해도 괜찮았을 거라고. 하지만 한 번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고.


매일 밤 그녀는 텅 빈 맥주 캔을 옆에 두고 잠이 들었단다. 잃어버린 사랑을 매일 떠나보내며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단다.


사랑은 어쩌면,

숙취 가득한 하루를 무사히 떠나보내는 일일 것이라고.







글│ 청민  淸旻

사진│ 청민  淸旻 / 아이폰 se, 2016




덧붙이는 청민의 말 │일상 수필, 그 열일곱 번째


한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야채 굽기 정도를 알고,

내가 좋아하는 꽃의 이름을 알고,

내가 좋아하던 계절의 문턱이 언제인지 알던 사람과

인사도 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는 것.


그래서 이별은,

언제나 마음 아픈 것 같습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리고 그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제 마음도 많이 아팠습니다.


사랑이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사람을 이토록 아프게 하지만... 또 그만큼 채워주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전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할 때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


사랑에 아파하는 분들과

사랑이 두려운 분들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행복하시기를, 이 늦은 밤.

뜨겁게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앗, 그리고 좋은 소식 하나 알려드려요.

친구들이 제 책,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를 보고서는,
작가와의 만남 같은 모임 하지 않냐고 묻더라구요.

만약 그런 자리가 생긴다면, 와서 저의 단점들을 폭로한다면서....(응, 내가 앞으로 잘할게. 사랑해.)
장난처럼 웃으며 했던 이야기가.. 정말 이루어졌어요.

2017년 2월 8일, 늦은 7시 30분.

목동 문화공간 <이어진 플레이스>에서 저와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감사한 시간이 생겼어요.
신청은 카카오톡 플러스친구 @이어진플레이스 에서 신청을 받는다고 합니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전하는 것 같지만, 실은 지금 엄청 쑥스러워하고 있어요..ㅎㅎ)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그리고 제 책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으시다면,
2월 8일에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

저는 쑥스럽고 부끄러우니, 그만 물러갈게요.


언제나처럼, 늘, 정말.
감사합니다.

2017년 1월의 어느 밤.
청민 (淸旻)






아주 날 것의 감정을 담는 곳입니다. 투박하지만, 그래서 좋아하는 공간이지요.

날 것의 마음만큼 솔직한 사랑은 없으니까요.


@청민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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