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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Feb 27. 2019

[film] 어느 주말의 기록

어쩌면 흐리멍덩하고, 또 어쩌면 또렷한


2018년 겨울에 썼던 일기입니다. 1년 전 겨울이네요. 이런 기록이 수두룩합니다. 브런치에 올려야지 하다가 올리지 못하고, 또 올려야지 글을 썼다가 올리지 못했던 글들이. 다시 하나둘 올려보려 합니다.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고, 때로는 일기처럼 때로는 수다처럼 약간은 가볍게.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어느 주말의 기록

금요일부터 토요일, 일요일 그리고 다시 월요일


필름 사진

그리고 나의 조각들



조각 - 일


언젠가부터 글 쓰는 게 어려워졌다. 뭘 그렇게 대단한 글을 쓰겠다고, 두렵기까지 할까. 그냥 쓴다는 행위가 어렵고, 누군가 내 글을 읽는다는 게 두렵다. 두려움의 꼬리를 쫒아 올라가 본다. 나는 본질적으로 무엇이 두려울까. 내 두려움엔 실체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어쩌면 나는 미움받는 게 두렵다. 내 문장을 누군가 보고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게 두려운 거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게 손가락질을 할까 두려운 거다. 나는 사람의 생각이, 아니 사람이 두려운 건 것 같다.





조각 - 이


나의 일상은 고요하다. 평범하고 또 평범하다. 사진을 찍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돈이 생겨서 필름을 대량으로 구매했다. 작은 카메라에 일상을 담아보려고 필름을 넣다가, 바닥에 세게 떨어뜨려서 흠집이 났다. 에잇.


DSLR은 매일 갖고 다니기 무겁고, 필름 수동도 좀 무겁고. 그래서 자동 필름 카메라와 작은 똑딱이 중에서 고민 중인데, 지금 갖고 있는 카메라가 너무 많아서 엄마 눈치가 좀 보인다. 우선 사놓고 한 번도 쓰지 않은 롤렉스 3세대 필름 카메라부터 작동시켜 봐야겠다. 그런데 촬영 방법을 몰라서.. 카메라 가게, 이번 주엔 꼭 들려야지. 그리고 작동법 여쭤봐야지.








조각 - 삼


초점 설정을 잘못했다. 풍경으로 설정해야 멀리까지 초점이 맞는데, 한 사람 초점으로 설정을 해서 이번 필름의 대부분 사진의 초점이 사라졌다. 뿌옇고 또 뿌옇다. 어떤 느낌이냐면, 안경을 벗고 길을 걷는 기분이랄까.


어렸을 때부터 눈이 나빴던 나는 오랜 시간 안경을 썼다. 안경을 깨 먹거나 잃어버리기라도 하는 날엔 언제나 이런 뿌연 거리를 걸어야만 했다. 몽롱한 상태로 길을 걸을 때마다, 나는 꿈속을 걷는 듯 신기했지만 한편으론 넘어질까 두려웠다. 또렷하지 않으니까, 분명하지 않아서 확신할 수 없으니까. 사진이 온통 그렇다. 안경을 쓰지 않은 시선으로 어딘가를 흐리멍덩하게 보고 있다.






조각 - 사


두 시간짜리 아르바이트를 갔다가, 한 시간 쉬고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길. 시장에선 설 준비가 한창이다. 어느 가게는 강정을 새롭게 만들고, 또 어느 가게는 굴비를 예쁘게 포장하고 있다. 손님들은 장을 보려고 시장 골목골목 물건들을 자세히 살핀다.


새해, 새해구나.

새해라는 말이 참 좋다.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이 담긴 말이라 그런가 보다. 지금까지






조각 - 오


요즘 필사를 한다. 두번 째 아르바이트를 가기 전, 30분 정도 쉼 없이 책을 따라 쓴다. 아르바이트 시간이 가까워져서 그런가 아니면 문장의 속도 때문인가. 문장을 쓰며 내 심장이 운동장을 뛰듯 쿵쿵 뜀박질하는 것 같다.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힘들다.







조각 - 육


주말을 맞아 영화를 봤다. 기대했던 영화였는데, 기대 이하의 영화가 되었다. 스토리가 산으로 가다 못해 땅굴로 들어갔다. 기대했던 영화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의 기분이란.


영화가 끝나고 끝까지 자리에 남아 영화의 여운을 느끼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보다 빨리 영화관을 빠져 나가고 싶다.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오직 씁쓸함과 지루함과 안타까움 같은 감정뿐이니까.


재미없는 영화를 만날 때마다 생각한다. 그래도 영화 한 편을 만들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노력했을까, 하고.


무언가가 성공하기 위해선 개인의 능력도 뛰어나야 하지만, 어떤 팀을 만나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모두가 똑같이 열심히 하고 노력하지만 성공하는 작품은 정해져 있으니까. 성공하기 위해선 운도 필요한 것 같다. 좋은 팀을 만나는 운, 좋은 상황을 만나는 운. 하지만 이 모든 운은 스스로가 준비된 상태에서만 작동될 것이다.








조각 - 칠


거울 속 나를 들여다본다. 너는 잘지내고 있니? 가끔 스스로에게 안부를 묻는다.






조각 - 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냉면집을 갔다. 우리는 배가 매우 고픈 상태라서 각자 냉면 한 그릇씩 시키고 사리까지 추가로 시켰는데, 세상에. 이게 냉면이야 대야야? 어마 무시한 냉면을 보고 우리는 호들갑을 떨었다. 대박, 대박 하면서. 우리는 푸드파이터가 된 심정으로 냉면을 후드득 먹었다. 시원한 국물을 꿀떡꿀떡 마셨다.


새콤한 국물을 좋아하니까 겨자와 식초를 넉넉하게 넣었다. 목을 넘어가는 국물이 따꼼따꼼하면서 상큼한 맛을 냈다. 좋다.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하루를 보내고 먹는 냉면이.







조각 - 구


나는 아이스크림을 가장 좋아하고, 다음으론 젤리를 좋아한다. 지금은 아이스크림 먹는 양을 좀 줄였는데, 한참 아이스크림을 먹던 시절엔 비타민 C 섭취하듯 아이스크림을 시간마다 챙겨 먹었다. 어제는 메로나, 오늘은 바밤바, 내일은 팥빙수. 그땐 매일 집으로 돌아가며 오늘은 어떤 아이스크림을 먹을까 고민하는 게 하루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는데.







조각 - 십


일요일엔 찍은 사진이 없다. 요즘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 시간의 꼬리에 물감을 달아 놓으면, 온 세상이 무지개-빛으로 빛날 텐데. 시간의 꼬리를 잡으려 노력하는데, 마음처럼 잡기가 쉽지 않다.


 







조각 - 십일


다시 월요일이 되었다. 내 모습을 사진을 남겨본다. 요즘 매일 입는 옷이 똑같다. 후리스에 패딩. 추운 겨울, 아르바이트 전용 복장이다.


자, 오늘도 커피를 맛있게 만들어 볼까!






조각 - 십이


올해 나의 다이어리. 지난해 산 해리포터 몰스킨 수첩을 다이어리로 쓰고 있다. 해리포터 에디션을 보는 순간, 꼭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해리와 헤르미온느, 론과 함께 자란 나로서 이 노트는 꼭 사야만 했다.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조각 - 십삼


수많은 사람들이 버스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그들은 어디에서 와서 또 어디로 갈까. 수많은 발걸음에게 오늘은 어떤 하루였을까. 버스정류소 뒷 건물엔 학원들이 줄지어 서있다. 수많은 학생들이 책을 손에 쥐고, 문제집을 들고 서있다.


그들을 지나치며 생각한다. 나는 어디로 와서 또 어디로 갈까.


한걸음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당장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그 이후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 걸까. 조금 우울하면서 조금 숨 가빴다.


필름을 인화했다. 초점이 다 나가 있었다. 흐리멍덩한 시선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은연중에 하고 있던 생각이 사진에 나타난 게 아닐까. 그래도 금방 괜찮다고 생각했다. 초점이 나갔지만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다고도 생각했다. 명확한 이유 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의 시간을 잘 버티고 있으므로. 앞으로 나아가려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있으므로. 이런 흐리멍덩한 시간이 쌓이고 쌓여 조금 더 나은 내가 될 거라는 기대를 해본다.


어쩌면 흐리멍덩하지만, 또 어쩌면 더욱 또렷한.

나의 어느 주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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