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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Mar 07. 2019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

낯선 나라에선 낯선 외로움과 고단함이 쉽게 쌓였다


겨울이면 눈이 산처럼 쌓이는 동네였다.


눈이 녹기도 전에 또 눈이 내렸다. 대구의 겨울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눈이 많이 오는 도시에 살면 쉽게 게을러진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을 뚫고 학교에 가야 한다니. 살짝 뭔가 억울하다. 그냥 침대에서 이불 뒤집어쓴 채로 초콜릿 먹으며 누워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게으른 몸을 일으킨 건 다름 아닌 맥도날드였다. 학교를 오고 가고 하면서 사 먹는 간식이 게으른 몸을 움직이게 했다. 나 같은 사람이 많았던 걸까. 맥도날드엔 언제나 사람이 넘쳤다. 고소한 기름 냄새와 녹은 눈의 축축한 냄새가 매장을 가득 덮었다. 맥도날드 바닥은 항상 더러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의 눈을 신발 바닥에 가득 매달고서 매장에 들어왔으니까. 아무리 깨끗하게 닦아도 바닥은 금세 새까만 발자국들로 가득 찼다.


새까만 발자국 사이엔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을 대걸레로 닦았다. 한 시간에도 몇 번씩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쉴 틈 없이 바닥에 쌓이는 흔적을 지웠다. 닦으면 다시 발자국이 생기고, 닦으면 또 발자국이 생겼다. 지루하고 허무해 보이는 일을 하면서도 소녀에겐 밝은 분위기가 풍겼다. 매일같이 맥도날드를 찾는 나를 알아본 소녀는 입 꼬리를 예쁘게 살짝 올려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해주던 소녀. 소녀를 마주칠 때마다 나는 낯선 나라에서 작은 빛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눈이 산처럼 쌓이던 동네에서 누군가의 흔적을 지우던 사람.


내가 남긴 발자국까지 꼼꼼하게 닦던 소녀는 내가 그 동네를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반복적이고 허무해 보이는 일을 성실하게 했다.





겨울만 되면 눈이 산처럼 쌓이던 동네가 그립다.

추워도 예뻤는데.


대구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 기껏 눈이 온다고 해서 기대했지만, 진눈깨비만 내리다 말았다. 어차피 닦아야 하는 바닥이면 눈이라도 예쁘게 펑펑 왔으면 좋았을 텐데. 손님들은 까만 물이 되어버린 진눈깨비를 이끌고 카페로 들어왔다. 오늘 카페 마감은 평소보다 힘들겠구나. 카페 여기저기에 찍혀있는 발자국을 보며 오늘 하루 얼마나 많은 손님이 카페를 찾았는지 어림짐작 해본다. 다들 어떤 하루를 살았을까. 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을 가진 발자국을 보며 그들의 오늘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유난히 잘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만나면, 눈이 많이 오던 동네 맥도날드에서 일하던 소녀가 떠오른다.






내가 매일 맥도날드를 찾은 건 외로움 때문이었다.


기숙사에서 부실한 밥으로 저녁을 때우는 게 싫어서, 맥도날드에 들려 햄버거를 사 먹기도 하고 돈이 없으면 감자튀김을 사 먹기도 했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화장실만 쓰고 나온 날도 있다. 낯선 나라에선 낯선 외로움과 고단함이 쉽게 쌓였다. 나는 매일 의식을 치르듯 오늘 하루 쌓인 감정을 맥도날드에 슬쩍 두고 왔다. 나의 고단함은 발자국으로 남았고, 소녀는 나의 발자국을 닦아줬다. 소녀에게 내 발자국은 지워야 할 수많은 발자국 중 하나였을 테지만, 소녀가 닦은 건 발자국 모양을 한 나의 외로움이었다. 소녀가 내 발자국을 지워준다고 생각하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친 것만 같아서 마음이 편했다. 내가 지금 닦는 발자국 중에서도 발자국 모양을 한 누군가의 외로움이 담겨있지 않을까? 유난히 떨어지지 않는 발자국을 보며 생각했다.


열 시 반이 되어 카페 입구에 closed 문패를 걸었다. 손님들이 가득 차 있던 카페에 고요함만 남았다. 내일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릇과 포크는 단정한 모습으로 준비되었고, 여기저기 남아있는 사람들의 발자국도 깨끗하게 지워졌다. 단 한 사람의 발자국도 남아있지 않는 카페를 가만히 보면서, 내일 새롭게 이곳을 채울 또 다른 사람들을 상상해본다. 몸은 고단한데 기분은 좋다. 나에겐 매일 하는 청소지만, 내일 카페를 찾는 누군가에겐 새로운 시작의 공간이 되길 바라본다. 가게의 문을 잠그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일 이곳을 찾는 모두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맞이하길, 내일 밤엔 외로움으로 찍은 발자국이 없길. 속으로 조용히 바라본다.





오래전 썼던 원고입니다. 겨울이 떠나는 게 아쉬워 서랍에서 꺼내 보았습니다.

서툰 부분이 많다는 걸 알지만, 용기 내 올려 봅니다.

올리다 보면 언젠간 늘겠지, 하는 마음으로.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


* 3/14 오후 일정 관계로 새벽 혹은 15일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ㅠ_ㅠ(3/14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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