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민 Apr 04. 2019

그레이 아나토미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든 버텨보면 무엇이든 내게 남지 않을까.

나는 버티는 걸 잘 못한다. 사극에서 ‘너의 배후가 누구냐’하며 주리를 트는 장면을 볼 때마다, 고문 받을 일 없는 현대에서 태어난 걸 감사하게 생각한다. 저 사람이 나였다면, 나는 다리 사이에 막대가 들어오기도 전에 배후를 불었을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드라마 속 캐릭터들처럼 각자의 설정 값을 갖고 태어난다.

내 설정 값 중 하나는 ‘버티는 걸 잘 못함’인 것 같다. 이때껏 나는 내 인내심 설정값이 작다는 걸 잘 몰랐는데, 천천히 돌아보니 내가 버티는 걸 잘 못하는 사람이라 그때 그랬겠구나 하는 순간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학창시절 공부에 있어서도 그랬고, 가까운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도 그랬으며, 뭔가를 하고 싶을 때도 그랬다. 시간을 들여 노력하고 버티고 그래서 뭔가를 성취한 경험을 아무리 떠올려 보려고 노력해도 그리 많지 않았다.



출처: yes 24



그런 내가 매일 빼먹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 잠자기 전 침대에 누워 <그레이 아나토미>라는 미국 드라마를 한 편씩 보는 것. 처음엔 드라마 시나리오 쓰기 수업 숙제로 매일 보기 시작했는데, 어느 새 습관이 되어 매일 비타민을 챙겨먹 듯 잠들기 전 한 편씩 꼭 챙겨본다. 2005년에 처음 시작한 그레이 아나토미는 최근에 시즌 15를 시작했다. 수많은 배우들이 이 드라마를 스쳐 지나갔지만, 주인공인 메러디스 그레이는 드라마가 방영되는 13년 내내 주인공 자리를 지키고 있다. 캐릭터와 함께 실제로 나이를 먹어가는 메러디스를 보면, 이제 그녀는 내게 단순히 드라마 주인공을 넘어 친밀한 친구같이 느껴진다. 내가 이 드라마를 몇 번이나 돌려볼 정도로 좋아하는 이유는, 첫째가 재미있어서이고, 둘째가 시즌이 길어 캐릭터들의 감정이 충분히 묘사되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론 순전히 메러디스라는 주인공 때문이다.



출처: 왓챠


메러디스의 인생은 고달프다. 처음부터 작가가 부여한 캐릭터 설정 값 자체가 어딘가 어둡고 꼬여있다. 아무리 드라마 캐릭터라고 하지만 메러디스가 처하는 상황들을 보다보면, 거 작가양반 정말 너무 한 것 아니오 싶을 정도다. 부모의 사랑이 결핍된 어린 시절을 보낼 뿐 아니라 엄마의 자살기도를 목격하고, 겨우 의사가 되어서도 온갖 사건 사고에 휘말린다. 총기사건이나 비행기 추락 사건처럼 큰 사건을 겪으며 사랑하는 동생과 동료를 잃고, 심지어 사랑하는 남편도 먼저 보낸다. 그녀 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다. 메러디스가 실제 인물이었다면 진작 심신미약으로 병원에 입원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니까.


메러디스의 주변 인물이 죽을 때마다, 팬들은 작가의 숙청이 시작됐다고 할 정도로 작가는 그녀에게 가혹하다. 그녀가 사는 드라마 세상에서 작가는 신과 동일한 존재일 텐데, 그녀는 신이 내린 가혹한 운명에도 13년 째 포기하지 않고 주인공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내가 그녀였다면 진작 다 그만뒀을 텐데, 그녀는 나와 달리 자신의 일터에서, 인생에서, 위치에서 온 힘을 다해 버틴다. 신이 내리는 절망 앞에서 그녀는 인턴에서 레지던트로, 전문의로 마지막엔 모든 의사가 탐내는 의학상을 수상하는 주목 받는 의사로 보란 듯이 성장한다.


긴 시간동안 이어지는 메러디스의 성장을 보고 있으면 그녀가 참 대견스러우면서도, 나는 왜 메러디스처럼 버텨볼 생각조차 못했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나는 왜 작은 일에도 버티지 못했을까, 아니 왜 그 자리에서 버틸 생각조차 못했을까.

메러디스는 최악의 설정 값을 갖고 있는데도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데, 나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그러면서 충분히 지킬 수 있었는데 지키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너무 쉽게 놓아버렸던 것들을 떠올린다. 그건 어떤 관계이기도 했고, 어떤 상황이기도 했으며, 내가 하고 싶다고 했던 어떤 일이기도 했다. 그건 순전히 나의 설정 값 때문이었을까. 솔직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설정 값은 그저 핑계였다.




그래도 내가 메러디스에게 위로 받는 것은, 그녀의 성장은 단박에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레이 아나토미란 드라마 세상 안에서 13년이란 긴 시간을 걸쳐 아주 천천히 이겨냈다. 엄마의 자살기도를 본 어린 아이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의사로 성장하기까지, 메러디스의 시간은 내가 살고 있는 시간만큼이나 느리게 흘렀다는 거다. 그녀도 사실 처음부터 잘 버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가 가진 기본 값 때문에 상황을 자주 회피했고,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할 때도 있었으며, 주변 사람을 크게 실망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아주 약한 의지로 시작했지만,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희미했지만 버티다 보니 시간이 쌓였고, 시간이 쌓이니 그녀는 자신의 설정 값을 하나 둘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자신의 설정 값에 묶여 아무 것도 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녀는 버텼고, 버티다 보니 긴 시간이 흘러서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남의 불행을 보고 내 위로로 삼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실수투성이인 메러디스의 인생을 보면 때로 위로가 된다.


태어났을 때부터 갖고 있던 자신의 본성과 상황을 긴 시간을 통해 이겨내는 메러디스를 보며 작은 용기를 얻기도 하고. 누군가 만들어 낸 허구의 이야기에 이토록 위로를 받을 수 있다니. 매일 밤 내가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를 보는 이유는 어쩌면 나를 향한 스스로의 다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삶에는 포기 말고도 버틴다는 선택지가 있다는 걸

잘 몰랐던 내게 메러디스의 삶은 용기가 된다.


쉽게 포기하지 말아보자,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든 버텨보면 무엇이든 내게 남지 않을까 하면서.




2019년 4월 4일 목요일, 청민의 말:


벌써 목요일이네요.

요즘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


mail _ romanticgrey@gmail.com

insta _ @w.chungmin

댓글과 좋아요는 힘이 됩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계절과 계절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