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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Jun 08. 2019

또 불합격

화면에 빨갛게 적힌 ‘불합격’을 보자,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솔직히 이번엔 붙을 거라고 생각했다. 확신은 아니고 될 것 같다는 느낌뿐이었지만. 포트폴리오의 마지막 멘트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조금 신경은 쓰였다만, 이력서는 꽤 잘 썼다고 생각해 안심하고 있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합격 자소서를 거의 다 훑었고, 뼈를 깎는 심정으로 자소서를 몇십 번 고쳐 썼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영혼을 갈아 넣었달까. 이 정도면 됐다고, 이 정도면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화면에 빨갛게 적힌 ‘불합격’을 보자,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이렇게 떨어질 줄 알았으면, 아침부터 긴장하고 있지 말 걸, 괜히 아침 굶지 말걸. 불합격이란 글씨를 보는데 심장이 아찔하게 떨어지는 듯했다. 불합격이 처음도 아니었지만, 이번 불합격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기대 때문이었다. 야 너랑 이 회사의 분위기가 비슷해서, 안 될 수가 없어. 내가 지원한 회사에서 일을 했던 선배의 말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 기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던 것이다. 대체 뭐 때문에 떨어졌을까. 영어 점수 때문일까, 자격증이 부족했나. 이제 와 이런 고민을 해봤자 소용없지만, 생각은 점점 많아졌다.


나도 좀 잘하고 싶은데. 엄마한테 나 취직했다고 말하고 싶은데, 내 몫의 돈을 벌고 잘 먹고 잘 산다는 거 좀 보여주고 싶은데. 그게 뭐라고 이렇게 어렵다. 무기력이 한순간에 나를 집어삼켰다. 바보 같았다. 남들 다 하고 사는 거, 나만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떤 결과물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그냥 오래도록 어딘가 가만히 누워만 있는 삶을 살아온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는 실험에 참가하면 2000만 원이나 준다던데. 누워서 버티는 삶을 이미 살고 있는데, 그냥 실험이나 참여하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불합격은 불합격이고 알바는 알바였다. 슬퍼도 일상은 똑딱똑딱 잘만 흘렀다. 어제까지 따듯했던 날씨가 하필 오늘부터 싸늘해졌다. 찬바람에 코끝이 시렸다. 외투 속으로도 찬바람이 스며들어왔다. 쓸데없이 마음도 슬쩍 시렸다. 나 열심히 살았는데, 나름 열심히 살았는데. 근데 불합격이란 말을 꼭 시뻘건 색으로 적어야만 했을까. 이젠 얼굴도 모르는 인사담당자가 미워졌다. 빨간색으로 쓰인 불합격이란 말은 왠지 나를 패배자로 낙인찍는 기분이 들었다. 열심히 살아온 나의 삶을 부정하는 것 같고, 삶 전체의 패배자가 되어 마치 불합격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초록색이나 파란색으로 썼으면, 이 정도 우울하진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창피하게 눈물이 났다.


오후의 카페는 나만큼이나 지쳐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늦은 오후. 하루의 중간이자, 사람들이 퇴근을 앞두고 나른 나른한 시간을 버티는 시간. 그래선지 이 시간대에 오는 손님들은 시럽이 듬뿍 든 달달한 커피를 찾는 편이다. 매일 바닐라 라테를 시키는 손님도 그랬다. 평소에 곁 대화 하나 없이 '바닐라 라테 아이스 하나요' 하며 주문만 하던 손님이, 오늘은 바닐라 시럽을 많이 넣어달라고 말을 덧붙였다. 매번 쌀쌀맞은 톤으로 주문만 하다가 뭔가 부탁을 하는 게 머쓱했는지, 멋쩍게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퇴근까지 버텨야 하는데, 이 달달한 커피가 없으면 버틸 수가 없거든요.’


손님이 가고 나도 손님을 따라 바닐라 라테 한 잔을 뽑아 마셨다. 달달한 향이 입안에 생각보다 오래 맴돌았다. 손님이 두고 간 ‘버틴다’는 말도 바닐라 향을 따라 내 속에서 함께 맴돌았다. 버틴다는 말을 속으로 곱씹기만 했는데도 괜스레 울컥했다. 버티는 삶이란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고 뒤로 후퇴하지도 않는 삶, 마치 바다 한가운데 난파된 배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삶처럼 느껴졌다. 요즘 내 삶이 딱 그런 것 같아서, 카운터 앞에서 주책없게 자꾸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도 버티다 보면 끝도 있지 않을까. 오후를 버티는 손님에게 퇴근 시간이 찾아오듯, 내게도 언젠간 초록색으로 쓰인 합격 소식을 듣는 날도 오지 않을까. 바닐라 라테를 홀짝홀짝 마시며 생각했다. 그래도 버티다 보면 끝도 있지 않을까? 찔끔 맺힌 눈물을 소매로 슥- 닦는다.


오늘같이 건조하고 우울한 일상을 그래도 견딜 수 있는 건, 내가 원하는 내일이 있을 거란 작은 희망 때문일테다. 더 나은 내일이 있지 않을까, 또 불합격 말고 합격을 받아 보는 날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 희망에게도 맛이 있다면, 지금 내 입에 남아있는 바닐라 향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바다 한가운데 멈춰있는 것 같지만, 어쩌면 나는 파도를 타고 어느 아름다운 섬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거야, 하면서. 달콤한 향이 철썩철썩, 입 속에서 파도 마냥 은은하게 흘렀다.






2019년 6월 8일 청민의 말:


지금은 회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쓸 적의 저는 모르는 이야기들이 요즘 자꾸 생겨나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일터로 향합니다.

마케팅을 해본 적이 없는 신입사원이라,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혼자만의 씨름을 끙끙합니다.


지난 5월은 홀로 깨달은 바가 많습니다.


제가 얼마나 중구난방의 신입인지,

타이밍이 중요한 업무에 모든 타이밍을 놓쳤는지,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 글을 썼던 제게 지금의 저는,

바닐라 향이 은은하게 나는 순간에 살고 있는 사람일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토요일입니다.

행복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마음에 작은 여유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유에서 작은 바닐라 향이 나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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