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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Oct 05. 2019

쓸모없는 것을 사주는 사람

어쩌면 나는 당신을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어리고 밝고 맑은 마음에.

#청민의플레이리스트
변진섭의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을 함께 들어주세요. 제가 가수 변진섭의 옛 노래를 좋아하는데요, 오늘 글 속에 등장하는 LP판의 수록곡이랍니다! 저도 이 노래를 들으며 오늘의 문장을 다듬고 있답니다. 좋은 토요일 되세요 :)







어렸을 때부터 갖고 싶은 건 대부분 쓸모없는 것이란 딱지가 붙었다. 낡고 오래된 것에 자주 마음이 빼앗기는 꼬마였기 때문일까. 처얼-컥 근사한 소리가 나던 필름 카메라, 테이프가 돌돌 돌아가던 마이마이, 오래된 잡음이 섞여 공간을 채우던 LP판 같은 게 동생의 로봇 시계보다 더 갖고 싶었다. 어딘가 오래된 것들이 좋았다. 삐까뻔쩍 대로에 전시된 것보다, 어느 낡은 골목 구석에 먼지가 쌓인 모습으로 숨어있는 것들에 애잔한 마음이 피었다. 그런 것을 보는 날이면 어딘가 그게 나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희로애락이 차곡차곡 담긴 것 같기도 해서 마음이 자주 밟히곤 했다.


엄마는 내가 어디선가 낡은 걸 주워오는 날엔 쓸모없는 것을 주워왔냐며 어디에 쓸 거냐며 웃으셨는데, 세상의 모든 게 신기하던 꼬마의 눈에 엄마의 시큰둥한 반응은 어딘가 정 없는 어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좋은 걸 어떡해. 그냥 마음이 이끌리는 걸 어떡해. 말하고 싶었지만 ‘쓸모없다’는 말 앞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내가 좀 많이 어디서 뭔가를 주워오기도 해서 면목이 없기도 했다. 사실 쓸모없는 물건이 맞았으니까, 그러니까 10살 꼬마 인생에 LP가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미술수업 준비물로 쓸 수도 없고, 집에 플레이어도 없어 듣지도 못하는데. 내가 주어 오는 것들은 어쩌면 쓸모없는 게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수리비용이 더 많이 들었으니까. 지금 당장의 삶에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우리 가족은 가난했고, 가난하다는 것은 집이 크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며, 집이 크지 않다는 것은 삶의 공간에 여유가 적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얼마 전 그와 동묘에 갔다가 우연히 LP가게에 들렸다. 그냥 지나칠까 했는데, 문틈으로 LP판이 가게에 빼곡히 차있는 걸 본 후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입구에서부터 풍기는 낡은 종이 냄새와 낡은 노랫가락. 나도 모르게 풀어지는 마음에 작은 웃음이 났다. 함께 온 그는 생각도 않고 벽에 바짝 붙어서는 변진섭 앨범이 있나 열심히 찾았다. ㄱ, ㄴ, ㄷ... ㅂ! 그래 이 앨범. 몇 개의 앨범 중에서도 좋아하는 수록곡이 들어있는 앨범을 찾고서는, 홀로 책장 앞에 가만히 서 LP판을 만지작만지작 했다. 그리곤 생각했다. 살까, 말까. 만지작만지작. 살까, 말까. 만지작만지작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웃음은 서서히 사라졌고, 나는 쓸모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물건이 내게 필요할까, 3만 원을 주고 이 LP를 산다고 해도 집에 플레이어가 없잖아. 사서 듣지도 못하는데, 이건 내게 쓸모없는 물건이 아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앨범을 가지런히 꼽아두고 나왔다. 다음 달 월급 나오면 사야지, 하는 뻔하고 뻔한 핑계를 대고선.


아쉬움 조금,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살 수 있다는 희망 조금. 아니 아쉬움 엄청 많이, 희망 조금으로 가게를 나서선, 만만하게 살 수 있고 적당히 쓸모도 있는 유리컵을 보러 갔다. 오래된 빈티지 유리컵도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한참 코를 박고 유리컵을 보고 있는데, 그가 화장실에 다녀온다면서 내게 쓸모도 없는 LP판을 사 온 게 아닌가. 그것도 내가 살까 말까, 만지작만지작 하던 변진섭 LP판을.





‘내가 당신 때문에 못살아, 정말!’


그가 내게 돈을 썼다는 게 미안해서 왜 그랬냐고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의 마음이 예뻐서, 내 생애에 LP판이 생겼다는 사실이 좋아서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는 내게 무언가를 꼭 하나 사주고 싶었는데, LP가게서 이걸 바라보던 내 얼굴이 아주 밝았단다. 눈을 못 떼었단다. 좋아서, 그래 그건 너무 좋아하는 눈빛이었단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을 사주는 사람이라니.


그냥 네가 이걸 좋아하니까, 네가 이걸 보고 밝게 웃으니까. 네가 행복해하니까. 그래서 꼭 사주고 싶었다는 그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보탤 수 없었다. 내가 오래된 것을 보고 그냥 좋아하는 것처럼, 쓸모없는 것을 좋아하는 나를 그냥 좋아해 준다니.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이걸 좋아하는 나와, 내가 좋아하는 순간을 함께 좋아해 주는 사람이라니.





‘당신이 좋아하니까.’


수줍게 말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아, 이런 사람이 내 인생에 있었었나. 없었는데. 'LP 플레이어 없잖아', '그런 걸 왜 사?'라고 말하던 숱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하던 사람, 세상의 눈으론 쓸모없지만 나의 세상에선 쓸모 있는 것을 그저 함께 해주던 사람, 좋아하는 걸로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 그냥, 그냥이라는 순간을 그저 함께 해주던 사람. 신기한 사람이 내 삶에 들어왔다.


동묘, 어느 낡은 골목. 구석에 먼지가 쌓인 어느 거리에서 나는 변진섭 LP를 손에 쥐며 생각했다. 어쩌면 당신을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고. 어리고 밝고 맑은 마음에, 당신과 점점 사랑이란 걸 해보고 싶어 질 것 같다고.








2019년 10월 5일 청민의 말: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표정 없는 세월을 보며 흔들리는 너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내가 미웠어

내가 미웠어


불빛 없는 거릴 걸으며 헤매는 너에게

꽃 한 송이 주고 싶어 들녘 해바라기를


* 새들은 왜 날아가나 바람은 왜 불어오나

내 가슴 모두 태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오직 사랑뿐.


-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변진섭, 1988.


-


아직 LP플레이어는 사지 못했어요.

그래도 어디선가 이 노래가 들려오는 기분입니다.


따듯한 가을 밤 되세요 :)

감사합니다.






청민 Chung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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