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달에서 아침을』을 읽고
가끔 생각해, 나를 은따 시키던 걔네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고등학교 졸업 직후엔 자주 생각했지만, 서른의 나는 고작 일 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하는. 하지만 여전히 '가끔'이라도 하는 쓸데없는 궁금증. 뒷자리에서 내 뒷담을 하던, 키가 컸던 단발머리 여자애는 어디서 무엇을 할까. 화장실로 나를 쫓아 온, 터질 것 같은 셔츠를 입고 다니던 애는 대학 가서 예뻐졌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지. 자기 수학 책을 훼손 한 범인을 찾는 데, 가장 먼저 짝꿍이었던 나를 의심했던 그 애는 뭘 하고 살고 있을까.
그리고 가끔 생각해. 걔네 말고 멀리서 나를 바라보기만 했던, 이름 없는 나머지 애들은 대체 뭘 하고 살까 하고.
회사에서 좋은 책이 나올 때면 신이 나. 이렇게 좋은 책이 우리 회사에서 나온다니! 회사에선 언제나 평범한 박자로 뛰던 심장의 박동수가 마치 기분 좋은 리듬처럼 느껴져. 없던 생기도 막 피어오르고. 업무에 치여 '으, 책 싫어!'란 말을 달고 살면서도, 좋은 책 한 권에 헤벌쭉하는 나는 정말 뭘까 싶지만. 흠흠. 한 달에도 수십 권의 책을 마주하는데, 그중에서도 내 맘에 쏙 드는 책이 있잖아. 『달에서 아침을』이 바로 그랬어.
사실 출판업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책을 예술가의 마음으로 읽을 순 없어.(나만 그렇다면 빠르게 반성.)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그게 먹고사는 일이 될 때, 우리는 주로 좋아하는 마음을 가장 먼저 포기하기 마련이니까. 근데 이 책은 잊고 있던 나의 예술가적인 마음을, 책을 좋아하는 마음을 다시 떠오르게 했어. 일단 되게 예뻤어. 묵직하고 빳빳해서 튼튼한 양장 제본에 달 모양으로 동그랗게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제작비가 꽤 많이 들었겠지만, 너무 예쁘다.
『달에서 아침은』은 토끼가 곰의 동네로 이사 오는, 어느 여름날에 시작되는 이야기야. 같은 동네에 사는 토끼와 곰은 취향도 비슷하고 통하는 게 아주 많아 금방 친한 친구가 되지만, 그들에겐 서로에겐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있지. 바로 토끼가 학교에서 은따라는 사실. 교실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토끼와 곰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아. 반 애들이 토끼를 싫어하거든. 특히 비둘기라는 애가.
왜 저 나이 때는 무리가 전부잖아. 3월 2일, 막 개학한 교실의 풍경. 우리 모두 알잖아.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데도 애써 말을 붙이는 거. 낙오되지 않고 안정적인 무리를 형성하기 위해, 애써 넉살 좋은 애처럼 보이려고 하는 거. 친구와 소속감이 전부이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땐 참 이상했어. 몸부림치지 않으면 쉽게 낙오되었고, 낙오된 아이들은 스스로를 부스러기처럼 여겼지. 어렸을 땐 왜 저 세상이 전부처럼 느껴졌을까.
토끼와 곰도 지난 나와 별 다를 바 없는 애들이었지만, 토끼는 왕따였고 곰은 그런 토끼를 모른 척하는 방관자였어. 자신을 방관자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방관자. 그렇게 토끼를 모른 척하던 어느 날, 곰의 마음을 흔드는 사건이 생겨. 바로 토끼를 가장 싫어하는 비둘기가 토끼에게 쪽지를 보냈거든. '너 꼴 보기 싫어. 너 같은 건 없어졌으면 좋겠어'라고 적힌 쪽지를 받고 옥상에 홀로 올라가 밖을 한참 바라보던 토끼를 곰이 발견하게 되지. 그 일을 계기로 곰은 자신이 방관자였음을 뒤늦게 깨닫고, 작은 용기를 내기 시작해. 그리고 마침내 긴 시간을 돌고 돌아, 토끼와 곰은 교실 안에서도 교실 밖에서 처럼 대화를 시작하게 돼.
쓸쓸한 토끼가 나는 참 좋았어. 어딘가 그 시절의 나를 닮았더라고. 토끼가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좋아하는 것처럼, 그 시절 나는 영화 <ONCE>를 좋아했어. 토끼가 <문 리버> 노래를 좋아한 것처럼, 나는 <Falling slowly>를 좋아했지. 토끼가 귀에 이어폰을 끼고 달로 향하는 장면을 보면서, 야자 시간에 이어폰을 끼고 저 멀리 <ONCE> 주인공들이 살고 있을 아일랜드에 다녀오던 나를 떠올렸어.
아파본 사람은 아픈 사람을 알아보기 마련이니까. 토끼가 되어본 사람은 알아. 토끼가 어떤 마음으로 옥상에 올라갔는지, 그동안 왜 그렇게 이어폰을 끼고 다녔는지. 같은 아픔을 가진 존재들은 서로를 알아봐. 페이지 구석에 숨겨 놓은 아주 작은 서로의 상처를
나도 그 시절 자주 옥상에 올라가서 노래를 들었어. 마음이 쓸쓸해지는 날엔, 노래를 들으며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저 멀리 개미처럼 작아진 학교를 엄지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곤 했거든. 이렇게 멀리서 보면 개미보다 더 작은 곳인데, 이렇게 손으로 꾹 눌러 터트려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옥상에 서서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내려온 날이 많았었거든.
그런데 말야. 나를 오래 아프게 했던 건, 내 뒷담을 하던 단발머리 여자애 때문도, 화장실까지 화를 내며 쫓아 오던 애도, 나를 의심하던 안경을 쓴 애 때문도 아니었어. 물론 걔네 때문에 오래 괴로웠지만, 진정 나를 무기력하게 했던 건 그걸 보고 있던 이름 없는 나머지 애들이었어. 침묵도 동의가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걔네를 통해 배웠어. 동의는 무기가 되어 누군가에게 다른 누군가를 쉽게 상처 내도 된다는, 어떤 합리성이란 '권력'을 쥐어준다는 걸. 나는 까만 덩어리 같은 그들을 보며 배웠어.
『달에서 아침을』에서 참 이상한 게 하나 있었어. 책 속 화자가 토끼가 아닌 방관자 '곰'이라는 점이야. 곰의 입을 통해 작가님은 다른 곰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으셨을까. 그 생각이 들어 오랜만에 조금 울었어.
근데 살다 보니 말이야. 나도 어느 곳에선 토끼가 되고, 또 어느 곳에선 곰과 비둘기가 될 법한 상황들이 생기더라고. 나는 토끼였으니 절대 비겁한 곰은 되지 말아야지, 못돼 처먹은 비둘기는 되지 말아야지 하는데, 상황이라는 게 나를 가끔 그렇게 이끌고 갈 때가 있더라고. 삶이란 거, 참 치사하지.
그런 기분이 드는 날엔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를 아프게 한 게 아닐까 싶어 슬퍼지곤 했어. 그래서 매일 아침 세수를 한 뒤, 거울을 보며 주문처럼 나를 보며 얘기하기 시작했지.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모른척하지 말자고. 누군가의 아픔을 안아주진 못하더라도, 친구가 되어주진 못하더라도, 그가 숨겨놓은 아픔을 모른 척하진 말자고.
그래서 가끔 생각해. 그 애들은 어떻게 살까.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나머지 애들은 뭘 하고 살까 하고. 어쩌면 내 삶에서 가장 아팠던 상처를 아물지 않도록 자주 열어봐. 토끼가 되어본 사람은 알거든. 토끼가 어떤 마음으로 옥상에 올라갔는지, 그동안 왜 그렇게 이어폰을 끼고 다녔는지.
그래서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어. 그날들을.
청민│淸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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