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형 <오늘도 초록>, 세미콜론 띵시리즈
내겐 ‘당근 친구’가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사용량이 평소보다 급증했다는, 그 유명한 중고 물품 판매 앱 ‘당근 마켓’에서 따온 말이다.)
도로 하나를 두고 사는 우리는, 사 근처에서 살아가는 1인 가구이면서, 요리를 즐겨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또 장을 볼 때마다 늘 1인분 이상의 야채를 사게 되어 처치 곤란하다는 공통의 고민을 안고 있었다.
재택근무를 시작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며, 당근 친구와 나의 나눔은 조금 적극적으로 변했다. 서로 쓰지 않는 물품 나눔에서, 과일이나 야채 나눔으로 변했다고 할까. 아무래도 집에서 해 먹는 날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당근 친구는 내게 주로 토마토와 오렌지, 고구마 등을 주었고, 나는 당근 친구에게 가지, 참나물, 버섯 같은 걸 주로 주곤 했다. 조금은 무기력하고 우울한 시기였는데, 내 식탁을 가득 채운 풍성한 야채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당근 친구에게 토마토를 받은 날엔 다진 마늘과 편 마늘을 섞어 올리브유에 자글자글 볶은 뒤, 껍질을 벗긴 토마토를 넣어 소금과 후추 그리고 건 파슬리로 조미를 하고 뭉글하게 끓인 뒤 숏 파스타를 넣어 먹었다. 아보카도를 받은 날엔 얇게 슬라이스 해 따끈한 밥에 명란과 서니 사이드 업을 얹은 뒤, 참기름을 두 바퀴 두르고 통깨를 부셔 슥슥 비벼먹곤 했다. 오렌지는 설탕에 절여 청을 만들어, 탄산수를 듬뿍 넣어 마셨다. 부엌에서 당근 친구가 준 야채들을 손질하며 복닥복닥 요리할 때엔, 마음이 이상할 만큼 평온해졌다.
초록빛 가득한 싱그러움을 주고받고, 그 싱그러움을 그릇에 담아 식탁 위에 올리는 모든 과정에서 나는 이상할 만큼 큰 위로를 받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초록>이 유난히 반가웠다. 좋아하는 걸 더 좋아한다고 뽐내는 취향 에세이라 반가웠고, 취향 중에서도 '맛'의 취향인데, 그게 또 초록빛을 가진 것에 향해있어 더 반가웠다. 여름만큼 초록과 잘 어울리는 계절도 없지만, 초록만큼 우울을 자연스레 치료하는 색도 없기 때문. 끝나지 않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지쳐가고, 한 것도 없이 벌써 2020년의 반이 흘렀다는 무기력이 나를 잡아먹는 요즘, <오늘도 초록>은 당근 친구가 내게 나눠준 싱그러운 어떤 품만큼 내게 초록 초록한 기운을 나눠주었다.
푸드 사진 한 장 없는 푸드 에세이를 읽고 나서,
나는 당장에 아스파라거스를 주문했다.
보통 아스파라거스를 올리브유에 소금과 후추를 넣어 담백하게 먹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오늘도 초록>의 한은형 소설가처럼 버터 조각을 넣어 먹어보고 싶기 때문. 내일 점심엔 냉장고 속 방울토마토, 양파와 갈색으로 잘 익은 아보카도를 찹찹 썰어 레몬즙을 섞어 나만의 과카몰리를 해 먹고, 저녁엔 아스파라거스를 버터에 무심한 듯 익혀 먹어야지. 오독오독 씹히는 맛에 크리미 한 버터의 향이 입혀지면, 얼마나 맛있을까.
초록은 참 신기하다. 초록을 생각한 것만으로 내 마음도 초록이 된다. 이번 여름엔 내 삶을 더욱 초록초록하게 가꿔야지. 무기력과 우울에 지지 않도록, 길어지는 집콕에 지치지 않도록!
* 책 속으로…
야채는 무엇을 넣어도 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린 카레 최고의 재료는 가지다. 아주 적절하게 익은 가지를 베어 물때의 감흥이란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미스터 하이 라이프의 그린카레로부터 배웠다. p. 63
나는 아스파라거스를 소탈하게 대하는 게 좋다. 무쇠팬을 2분쯤 달구다 물을 조금 넣으면 곧바로 바글거리는데, 여기에 아스파라거스를 넣어 뒤적거리는 식으로 조리해준다. 증기가 아닌 버터를 묻히고 싶은 날이면 물 대신 버터를 넣고 역시 뒤적거려주면 된다. 소금도 톡톡. 물 혹은 버터를 온전히 수용한 아스파라거스를 씹으며, 초록의 순연함을 느낀다. p.75
양파는 언제나 놀랍다. 양파를 썰었을 뿐인데, 양파를 볶았을 뿐인데, 시각과 후각과 촉각과 청각이 깨어난다. 보라 양파를 썰 때마다 처음 요리를 하던 그때의 나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이제 눈물이 덜 나는 건 좋은 일일까 안 좋은 일일까도 생각하면서. ‘양파는 하나의 세계군.’이라고 다시 한번 감탄 하면서. p. 107
나도 하고 싶어졌다. 누군가의 문고리에 그 누군가가 좋아하는 무엇을 걸어 두는 일을. 그것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설렐지, 그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고 나한테 무슨 말을 할지 등등 상상의 나래를 폈다. p.133
‘다음에요.’라고 말하면 사실 그 기회는 날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늘 생각한다. 사고 싶거나, 가고 싶거나,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바로 해야 한다고. 그 순간을 놓치면 ‘다음’은 없다고. p. 154
이렇게 기쁨이 강렬한 것은 내가 그 음식을 오래도록 생각해왔기 때문일 거다.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상상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것이 어릴 적 궁금해 하던 그 음식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p.190
<오늘도 초록>
* 한은형 소설가 지음
* 2020년 5월 20일 1쇄
* 출판사 세미콜론 / insta @semicolon.books
* <오늘도 초록>은 세미콜론의 '띵' 시리즈의 세 번째 도서입니다. '띵' 시리즈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고 싶은 마음”을 중심 메세지로 둔 음식 에세이 시리즈로, 각 권마다 하나의 음식을 주제로 선정해 그 음식과 관련된 작가의 내밀한 이야기를 담습니다. 다른 단행본과 달리 (독특하게), 인트로에 이 책을 편집한 편집자님의 에디터 레터가 있습니다. 비하인드 스토리를 읽는 쏠쏠한 재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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