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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Sep 09. 2020

작은 온기에 기대 시작한 하루

#9. 이름 모를 개와 나란히 앉아 일출을 보던 날에 대하여


추위에 새벽 일찍 눈을 떴다. 온몸이 시리다 못해 얼 것 같았다. 양말 두 겹을 신고 잤는데도, 발 끝이 얼어 감각이 둔탁했다. 침낭이 얇은 탓이었다. 곧이어 허리까지 아파왔지만, 추워서 쉽게 몸을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게르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여명이 밀려왔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는 바람 소리도 들려왔다. 다시 눈을 감아볼까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일찍 일어난 김에 일출이나 볼까 해서, 침낭을 몸에 돌돌 감싼 채로 홀로 게르를 나섰다.


어쩌다 나는 몽골에 있다. 오래된 친구가 몇 년을 꼬신 결과였다. 몽골 가자, 나는 너랑 꼭 몽골에 가고 싶어. 친구와 여행을 크게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몇 번을 돈이 없으니 취업하고 가자고 에둘러 거절해왔으나, 취업까지 한 마당에 더 이상 댈 변명이 없었다. 결국 나는 몽골에 가기로 했고, 고작 입사 6개월 차인 신입사원인 나는 앞뒤 주말을 붙여 총 11일 동안 여름휴가를 써 몽골에 왔다. 하루에 몇 번씩 문득문득 회사에 별 일 없나 걱정이 되었지만, 몽골은 자주 인터넷이 끊기는 나라였고, 나의 걱정은 오늘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문을 여니 차가운 하늘이 나를 맞았다. 아직 어둑어둑 하지만, 저 멀리 햇빛의 머리칼이 보이기 시작했다. 곧 해가 뜨겠구나. 게르 뒤에 있는 작은 언덕에 올랐다. 단단한 흙 위에 크고 작은 돌로 세워진 언덕이었다. 온몸을 침낭으로 둘러싸고, 후드를 쓰고 줄을 꼭 맸는데도 추웠다. 그때, 큰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큰 개의 등장에 순간 얼어 붙었으나, 돌산을 올라가는 내내 조용히 내 뒤를 따라 오르는 모습에 마음을 풀어버렸다. 두려움 반 신기함 반으로, 그에게 홀로 말을 걸었다.





너는 집이 이 근처야? 나는 저 멀리 한국에서 왔어. 몽골은 처음이야. 여름휴가를 무려 11일이나 내고 왔어. 아, 나는 저 아래 게르에서 자다가 추워서 잠이 깨가지구, 일어난 김에 일출을 보러 나왔어. 너도 나처럼 일찍 잠이 깼어? 근데 너는 이름이 뭐야? 나는 네 말을 모르니까, 그냥 잠시 산책이라고 부를게.


대화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한 혼잣말도 아닌 말을 홀로 중얼중얼 내뱉으며, 이른 새벽 산책을 함께 해준 이 아이를 잠시 산책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산책이와 발걸음을 맞춰 작은 돌산에 올랐다. 정상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언덕의 꼭대기에서, 자리가 평평한 곳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리곤 내 옆 자리에 손을 톡톡 치니, 산책이가 옆에 와 앉았다. 그렇게 우리는 몽골의 어느 작은 언덕에 나란히 앉아, 하루가 탄생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햇빛이  조금씩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여전히 따듯하진 않았지만, 새벽의 찬기는 살짝 사라진 듯했다. 느릿한 태양을 기다리는데 자꾸 하품이 났다. 내가 먼저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 하면, 산책이도 연달아 입을 쩍 벌려선 하품을 하 했다. 우리는 서로 번갈아 가며 하품을 쩍쩍하면서도, 신기하게도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 외로울 수 있었던 새벽의 산책 길이, 산책이로 인해 문득 행복해졌다. 여전히 슬쩍 쓸쓸했으나, 덕분에 나는 울지 않을 수 있었다.


몽골은 참 아름답다. 초원 너머에 초원뿐이다. 하나님이 스케치북 가운데에 선을 하나 딱 긋고, 위는 하늘 아래는 초원이라 이름을 붙이신 것 같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하늘을 막는 게 하나도 없다. 내가 사는 일산에선 하늘을 보려면 네모난 건물들에 가려 조각조각으로만 봤어야 했는데. 여긴 하늘이 통째로 있다. 하늘 아래 있는 거라곤 초원과 나뿐. 거대한 초원의 한가운데에 산책이와 나는 함께 앉아 있다. 세상 낯선 곳에서 낯선 존재와 있는데도, 나는 친구들이 있는 게르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때로는 나를 모르는 세계에서 가장 자유롭다.




신입사원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스스로를 의심한다. 설마 이것도 모를까 하는 것도 모르고, 하나부터 열까지 사수에게 질문을 해야만 한 발자국을 뗄 수 있다. 직장인이 출근과 퇴근 사이 갇힌 존재라면, 신입사원이란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아닌 걸까 하는 의심의 굴레에 갇힌 존재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신입의 모든 기분을 두고, 나는 이 멀리까지 와 있다. 그리곤 어김없이 뜨는 해를 바라본다. 내가 직장인이든, 하루에도 수없이 스스로를 의심하는 신입사원이든 뭐든 상관없을 산책이와 함께. 때로는, 아니 나는 정말 나를 모르는 세계에서 가장 자유롭다.


태양이 완전히 얼굴을 꺼냈다. 구름이 많아 선명하진 않았지만, 구름 뒤에 비치는 태양의 그림자에 나는 태양이 저기 있음을 알았다. 가려진 풍경까지도 아름다웠다. 선명하지 않지만 빛은 온 초원을 밝혔다. 그림자 하나 지지 않도록, 새로운 빛을 끊임없이 뿜었다. 내 속 구석구석에 숨은 기분들이 씻겨 나가는 듯했다. 그런 기분 따위는 아름다움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라 말하고 있는 듯했다. 아름다웠다. 산책이도 가만히 태양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나는 괜찮아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 데, 그냥 평소처럼 태양은 자기 몫을 했고, 산책이는 그냥 내 옆에 앉아 있었을 뿐이었는데. 나는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힘이 생겼다. 마치 밤의 여왕을 물리친 낮의 마법처럼.




눈 부신 풍경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 여전히 산책이는 내 뒤를 졸졸 따랐다. 작은 언덕에 내려온 다음, 산책은 내 앞으로 돌아 태양의 방향으로 사라졌다. 나는 멀리 사라지는 산책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인사와 함께. 아침 산책을 마치고 게르로 돌아오는 길. 춥지 않았다. 몸을 두르던 침낭을 벗어 손에 쥐었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작은 한기까지 태양에 바짝 마른 듯했다.


작은 온기에 기대어 시작한 하루. 작지만 분명히 행복한 순간이었다.






청민│淸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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