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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Sep 08. 2020

10원의 여행

#8. 나는 소중하고 귀한 존재였어!

요즘 10원짜리 동전을 쓰는 사람이 있을까.


현금보다는 카드를, 카드보다는 온라인 결제를 하는 세상에서 10원은 어느 만큼 의 부피를 가질까. 어쩌다 10원짜리 잔돈이 생기면 친구들은 서로 가지라며 서로의 주머니에 몰래 버리기도 한다. 길 가다 화단에 보면 버려진 10원을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나도 10원을 귀찮아하지만,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10원들을 보면 쓸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초등학교 2학년 즈음, 구연동화 대회에 나갔다. 딱히 나가기 싫었는데, 주변에서 하도 잘한다 잘한다 칭찬해줘서 별생각 없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나갔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엄마가 학생 때 구연동화 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이유가, 가장 큰 이유로 내 심리를 자극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는 구연동화에선 표현력이 제일이라 했다. 말과 가벼운 손동작만으로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라도 얼마나 감동적으로 표현하는지,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는지가 관건이었다. 엄마는 구연동화 구 금메달리스트답게 이제 막 데뷔전을 앞두고 있는 나의 구연동화를 아주 세심하게 코치해 줬다.


나의 이야기는 10원짜리 동전의 여행기였다. 사람들이 매기는 10원의 가치 말고, 자기 있는 그대로의 존귀를 스스로 깨닫게 되는 이야기였다. 그때는 현금을 쓰던 시대였음에도, 10원의 가치는 지금과 별 다르지 않았나 보다. 구연동화는 A4 용지 한 장 정도의 긴 분량이었지만, 나이가 어려 기억력이 좋았던지 녹음기처럼 이야기를 툭 누르면 줄줄 읊었다. 백 번도 넘게 10원의 이야기를 반복했다. 이야기에 인생 최대의 감정을 녹여서.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였지만, 나에게도 10원은 그냥 10원이었고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였다.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말을 백 번도 더 연습했기에, 스스로를 향한 사랑은 어느 권위 있는 과학자가 내린 정의처럼 당연하지만 가깝지 않은, 낯설진 않지만 그렇다고 직접 와 닿지 않는 이야기라 여겼던 것 같다.


구연동화 1차 대회에선 1등을 했지만, 대구 전체에선 3등을 했다. 동네에서 진행한 1차 대회는 뭐 떨리지도 않았다. 같이 연습하던 얼굴들이 보여 부끄럽지도 않았는데, 대구 전체 대회를 할 땐 손이 바르르 떨 정도로 긴장을 했다. 동네와 비교도 되지 않게 큰 건물, 삐까뻔쩍한 옷을 차려입고 온 다른 지역 애들. 수없이 했던 연습들이 보잘것없이 바스러지는 기분이었다. 연습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 실전에선 그냥 대사만 뱉어냈다. 나를 보는 낯선 사람들의 눈빛에 괜히 기가 죽었다.


동메달을 목에 걸었음에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나를 괴롭게 만든 것은 금메달을 따고 전국대회에 가지 못한 것도, 말을 더듬은 것도 아니었다. 엄마가 1등을 했던 대회에서 내가 3등을 했다는 게, 왜 그렇게 창피했을까. 엄마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내게 흘리는 아쉬운 눈빛을 보며, 엄마 앞에서 재능 없는 딸이 된 것 같아 부끄러웠다. 수고했다며 꼬옥 안아주는 엄마의 포옹도 내 마음을 달래기엔 부족했다. 어린 마음에 엄마 앞에서 멋지고 자랑스럽게 잘 해내지 못한 나를, 꽤 오랫동안 미워했다.




작은 이유로 스스로를 미워하는 

어렸을 때나 커서나 별반 다르지 않다.


살면서 자신을 매 순간 충실히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미워하지 않고, 매 순간 자기 존재의 가치를 믿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나는 작은 순간에도, 꽤 괜찮은 결과를 가진 순간에도 손쉽게 나를 미워하곤 했다. 자주 몰아세웠다. 아르바이트에서 잔실수를 했을 때, 별 것 아닌 이유로 애인에게 벌컥 화를 냈을 때, 기대했던 것만큼 내 상황이 흘러가지 않을 때. 실은 대단한 이유도 없는데, 삶의 사소한 사건 사이사이에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을 열심히 심곤 했다. 사랑하는 건 이렇게 어려운데, 미워하는 건 왜 이리 쉬운 건지. 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한데, 나만 또 유난스러운 것 같이 느껴지는 날도 많았다.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니. 미움은 이렇게나 쉬운데.


10원은 길고 긴 여행을 마치며

'아, 나는 소중하고 귀한 존재였어!'라고 다짐하듯 외친다.


백 번도 넘게 10원의 말을 뱉었지만, 늘 같은 의문이 들었다. 10원의 다짐은 언제까지 유지됐을까 하는. 변한 것은 10원의 마음뿐이고, 세상은 그대로였을 테니까. 여전히 10원을 무시하고 귀찮아했을 테니까. 변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10원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킬 수 있었을지 궁금해진다. 그래도 한 백 번쯤 외치다 보니, 10원이 온전히 자신을 향한 사랑을 다 지키진 못하더라도, 끝없이 노력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한 백 번쯤 10원의 말을 따라한 나처럼. 첫 번째 연습과 100번째 연습 때의 내가 10원의 대사를 다른 감정으로 읊었던 것처럼. 쉽게 자신을 미워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았을까. 긴 여행을 마친 10원은 여행 전의 그 10원이 더 이상 아니었으니까.


길가에서 아무렇게 버려진 10원들을 종종 만난다.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진 곳, 컴컴하고 먼지가 많은 작은 틈, 쉽게 찾을 수 없는 구석에서. 우연히 그들을 하나 둘 마주치는 날이면 주워선 알코올 스왑으로 깨끗이 닦고 책상 위의 작은 작은 컵에 땡그랑 넣어 준다. 땡그랑 소리를 내며 10원들끼리 서로 맞대어 소리를 내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10원과 닮은 나의 동메달을 떠올린다.


스스로를 사랑해보겠다고 애쓰던 유년의 나와, 여전히 스스로를 자주 미워하는 나를 함께 생각한다. 그리곤 구연동화 마지막에 내 입으로 수없이 외쳤던 문장을 떠올린다. '아, 나는 소중하고 귀한 존재였어!' 나는 결국 오늘도 나를 사랑하기로 꼭 마음먹는다.





청민│淸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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