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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Sep 07. 2020

곰팡이

#7. 소중한 공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지금껏 살았던 많은 집들 가운데, 나는 남양주 집을 가장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집을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아빠의 서재 때문이다. 아빠는 공부하는 사람이었고, 유년의 기억엔 언제나 책이 있었다. 언덕 위, 작은 아파트 가장 꼭대기 층. 다리 빠지도록 언덕과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면, 바로 오른쪽에 보이는 작은 방이 아빠의 서재였다. 사방이 책장으로 빼곡 차서 작은 내가 거기에 누워 있으면 마치 숲 속 한가운데 누워있는 기분이었다. 해가 잘 들지 않는 방이라 늘 달고 다니던 젖은 책 냄새와 서늘한 그림자가 잔뜩 낀 방. 거기다 불투명한 유리의 미닫이 문까지. 어린 내게 아빠의 서재는 신비하게만 느껴졌다. 늦은 밤 그 방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좁은 주방에 켜진 불이 유리를 통해 왜곡되어 보였다. 유리에 빛이 번지는 모습이 나는 꼭 나팔꽃 같다고 생각했다.


아빠의 서재는 시원했고, 아득했지만 곰팡이 냄새가 났다. 어린 나는 그걸 숲 속 냄새라고 생각했지만, 돌아서 생각해보면 그건 분명한 옅은 곰팡이 냄새였다.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고 창문도 작아 습한 기운이 늘 있던 방. 처음엔 곰팡이인지 몰랐다. 남양주 집으로 이사 오고 맞은 첫 여름, 어린 동생이 음식을 어디다 숨겨 두어 썩었나 싶어 엄마가 온 집안을 들췄던 기억이 난다. 장마가 오고 그게 곰팡이 냄새라는 걸 알았다. 옅게 퀴퀴한 젖은 종이 냄새. 장마 때마다 엄마 아빠는 서재의 책들을 다 꺼내서 책장 앞뒤를 걸레로 박박 닦고, 선풍기를 돌렸다. 여름만 되면 걸레를 들고 책장을 드러내고 책을 닦던 엄마 아부지의 모습이 가끔 떠오른다.




나는 부정적인 것에 집중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같은 상황에서도 은근슬쩍 불평이 앞서는 사람.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내 기분과 생각도 그를 닮는 듯했다. 싫어하지 않았는데, 작은 단점들을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정말 그게 그렇게 보이는 날도 있었다. 사람이 마음이란 게 참 얇아서, 작은 물방울에도 쉽게 젖어버리기 마련이니까. 같은 일이라도 좋게 좋게 하는 게 좋았다. 싫은 것도 무작정 좋게만 보자는 말이 아니라, 싫은 것보다 좋은 것을 더 크게 보는 사람이고 싶었달까.


하지만 돈을 벌다 보면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난다. 속에선 불이 나지만, 참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남의 돈을 번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작은 업무도 내 마음 같은 게 별로 없었다. 특히 함께 일하는 사람의 영향을 어쩔 수 없이 많이 받게 되는데, 한 번은 일은 잘 하지만 점장이 없을 때마다 점장의 부스럼을 긁는 사람을 만났다. 그와 나는 거의 매일 붙어 있어야 했고, 일이란 게 참 야속한 게 같이 붙어 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융화되는 지점이 있었다.


그날도 비슷한 날이었다. 그의 부스럼에 영혼 없이 그냥저냥 맞다고 해주던 날. 자동적인 리액션에 스트레스가 조금씩 쌓여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하던 지점이기도 했다. 편하지만은 않은 마음을 꾹 누르고 있다가, 일이 땡 끝나면 가게를 도망치듯 나와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나름의 억울하고 신경이 쓰였던 일을 얘기하며 감정을 풀었다. 친구가 동의를 해준다 싶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 짜증이 섞여 나왔다. 어김없이 퇴근 후 오늘의 감정을 풀던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근데 어쩌면 네가 싫다는 그 사람과 너도 별 다르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어. 순간 마음이 바짝 섰다.


곰팡이는 처음에 잘 보이지 않는다. 습하고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 냄새를 풍기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아 그냥 지나칠 때가 있다. 그러다 장마라도 오는 날엔, 거대한 형태로 벽지와 장판 밖으로 튀어나온다.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책의 표지까지도 옮는다. '근데 너도 걔한테 별 다르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어'라는 말은 내 속에 곰팡이가 피고 있다는 어떤 신호 같았다. 내가 함께 일하는 그를 영혼 없이 그냥저냥 맞다고 해주는 것처럼, 내 친구도 나를 향해 그냥저냥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그때. 냄새가 났다. 곰팡이 냄새가.



친구의 말이 맞다. 언젠가부터 내가 뱉는 말의 형태에 모가 났다. 일이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것보단 부족한 부분을 크게 보았다. 그게 쉬웠다. 좋은 걸 만들어내는 데는 오래 참음과 기다려주는 마음이 필요했는데, 부족한 것을 보는 데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기 때문. 돌아보니 어쩌면 나는 내게 갈퀴가 있다는 걸 전혀 모르지 않았던 것 같다. 상대가 내 얘기를 받아주는 것 같으면, 때때로 '짜증 나', '싫어' 같은 말을 대화에 은근슬쩍 섞기도 했으니까. 그건 모르고 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었으니까. 전화를 끊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내 모습과 마주했다. 곰팡이가 피고 있는 내 모습을.


엄마는 아빠의 서재에 곰팡이가 생기면 책장에 꽂힌 책들을 모두 다 부엌으로 빼고, 온 방을 손걸레로 꼼꼼히 닦았다. 그 작은 방을 닦으면 또 얼마나 깨끗해진다고. 하루 종일 붙어 청소를 했다. 그리고 비가 그치면 온 집의 문을 열어 오래 환기를 시켰다. 없는 집에 온종일 선풍기가 달달 돌아갔다. 하지만 엄마의 노력에도 곰팡이는 비만 오면 다시 피어났다. 그럼 엄마도 다시 책장에서 책을 꺼내 벽과 바닥을 닦아 냈다. 그 집에 살던 몇 년 내내 곰팡이는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혔지만, 엄마 아빠는 부지런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곰팡이는 아빠의 책 중 그 어느 것도 훔쳐가지 못했다.


소중한 공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부지런히 공간을 살피는 일. 책장에 가려져 안 보인다고 모른 척하지 말고. 어느 습한 곳에 퍼지고 있는 못된 곰팡이를 꼼꼼하게 닦아주고, 창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처럼 온몸에서 곰팡이 냄새가 진동을 할 테니까. 노력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소리 소문 없이 곰팡이가 내 마음의 방을 다 잡아먹을지도 모를 일일 테니까.







청민│淸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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