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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Oct 31. 2021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지

청민 x Thousand Korea │ 자전거 에세이 #4

직장인에겐 ‘여행을 떠나는 마음을 먹는 일’도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예전엔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었지만, 직장인은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돈도 언제나 촉박했다. 나만 그런 걸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상하게 좁아지는 세계에 ‘적어도 계절에 두 번 이상은 떠나자’라는 나름의 규칙을 만들었다. 이런저런 핑계로 나에게 중요한 것을 영영 미루지 않기 위함이었다.

 
 쉽게 떠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떠나는 날만큼은 더 멀고 깊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도시와 어렴풋이 연결되어 있으면서,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통과하고 싶었다고 할까. 그래서 자전거를 챙겼다. 작게 접히는 브롬톤 자전거는 대중교통을 쉽게 탈 수 있어서, 자동차가 없지만 더 멀리 더 오래 길에 있고 싶어 하는 내게 딱 알맞은 여행 수단이기도 했다.

 
 가을의 첫 여행은 친하게 지낸 선배가 추천해 준 캠핑장.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며, 그곳에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마음 얹힌 게 쑥 내려가는 것 같다고 했다. 선배의 말을 듣고 금요일 반차 여행 준비를 했다. 오전까지만 일하고 점심에 떠나는 여행. 금요일 반차 여행은 주말을 조금 더 길게 보내는 느낌이 들어 자주 사용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최소한으로 짐을 준비해도 자전거 캠핑은 언제나 무겁다. 가방뿐 아니라 자전거도 온전히 내 힘으로 들고 움직여야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든든한 점심은 필수다. 지도를 찾아보니 지하철에서 내려 20km 정도 자전거를 타면 캠핑장에 도착하겠구나. 평소 일산에서 서울 망원동까지 자전거를 자주 타고 오가니, 뭐 이 정도쯤이야.



ⓒ청민


하지만 언제나 삶은 예상과 다르게 흐르고, 대비하지 못한 채로 위기를 맞는다. 아니, 이 언덕을 오르라고? 자전거로 충분히 갈 수 있다던 길은 언덕, 아니 그냥 언덕이 아니라 작은 산이었다. 길어지는 코시국에 잔뜩 살이 쪄서 내 몸 하나 감당하기 어려운데, 거기에 짐 무게까지 더해지니 나만 한 큰 돌을 업고 자전거를 타는 것 같았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지금 이러고 있나’는 생각에 당장이라도 자전거를 길에 버리고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러 가버리고 싶지만, 또 어떻게든 페달을 밟다 보니 오르막이 끝났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오르막 뒤에 나타나는 내리막길. 언덕이 오를 때면 숨이 턱턱 막혀서 다 포기하고 싶어져 잊고 있었는데, 오르막이 있으면 시원한 내리막길도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온몸의 근육이 소리를 질렀는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내려오는 길은 어느 때보다 상쾌하다. 아아, 계속해서 쉬운 길만 나왔으면.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나의 언덕이 끝나고, 나는 무려 2개의 언덕을 더 넘어 캠핑장에 도착했다.

 
출발 때보단 열 배는 더 무거워진 페달을 밟으며 도착한 캠핑장. 거울 속에 나는 땀으로 샤워를 한 것처럼 축 젖어있다. 자꾸 목으로 숨을 쉬어서 아파지는 호흡. 이런 힘듦이 싫으면서도 나는 왜 또다시 자전거를 타고 캠핑을 떠나는 건지. 허탈하기도 하고, 이런 내 꼴이 우습기도 해서, 웃음이 ‘하하하’ 나왔다. 거울 속 내 얼굴엔 고생의 흔적이 잔뜩 묻어 있더라. 이게 뭐야, 정말!



ⓒ청민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고 또 흘러나간다. 세상의 길을 몸속에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자전거를 타고 길을 달리는 것이다.' 김훈 작가님의 <자전거 여행>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자전거 캠핑은 다른 여행보다 두 배는 더 힘들지만, 다시금 또 떠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게 아닐까.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나아갈 때, 온몸으로 세상을 감각하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배우는 것 같다. 평소엔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팽팽한 허벅지 근육으로, 목 끝까지 차오르는 호흡으로, 잔뜩 힘을 준다고 생겨버린 손바닥 굳은살로, 새로운 길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나가는 게 아닐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또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다. 그러니 지금 내 앞에 놓인 힘듦이 세상의 전부인 냥, 고개만 푹 숙이고 있지 말아야겠다고 혼자 캠핑장에 앉아 웃으며 생각했다. 하루는 다 끝나봐야 아는 것이고, 마음을 무겁게 하는 무언가도 다 지나 봐야 제대로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을 볼 때 어두운 그늘이 있어 보인다면, 저 사람은 그저 힘든 오르막길을 올라가고 있는 거구나 생각해보기로 한다. 누군가 고개를 오래 푹 숙이고 있다면, 자신이 없어 매일 망설이는 것 같다면 그저 그는 오르막길을 걷고 있는 거구나 생각해 보기로. 나에게도 세상에도 조금은 곁을 내어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거울 속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글쓴이 │ 청민(淸旻)


romanticgrey@gmail.com

@w. chungmin : 오늘 여행자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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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콘텐츠는 Thousand Korea와의 협업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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